• 2016.12.10 (토요일)

선강퉁과 눈 뜬 장님"한국은 중국금융 전문가 층이 얇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고 광범위한 중국 자본시장을 이해하려면 갈 길이 너무 멀다." 중국 선강퉁(광둥성 선전증시와 홍콩증시의 교차거래) 시행 전 베이징에서 만난 한 투자전략가의 말이다. 20년 가까이 중국과 홍콩, 한국을 오가며 외국인투자유치를 비롯한 투자중개 사업가로 활동 중인 그는 국내 금융투자업계가 중국을 바라보는 투자시각을 '눈 뜬 장님'에 비유했다.  선강퉁 시대를 겨냥한 국내 금투업계의 마케팅 경쟁은 치열하다. 저마다 분석 역량을 자랑하며 변화 많을 중국 주식시장에 투자할 것을 권한다. 이번이 중국 신경제에 투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쏠림을 부추긴다. 중국의 나스닥이라 불리는 선전증시 개방으로 중국경제의 전통적인 성장동력보다 IT, 소비재, 미디어, 헬스케어 등 신경제 주도 산업에 투자할 수 있다고 진단하면서다. 절로 관심이 모아진다. 저성장 저금리에 지친 투자자로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강퉁 시행 3거래일(5~7일) 동안 1억2822만위안(219억원)의 국내 자금이 순유입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심천시장은 이미 중국 내국인들에 의해 급등한 시장이고 고평가돼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전문가들조차도 향후 얼마나 큰 변동성을 불러올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중국 자본시장이 개방 초기단계라는 점에서 리스크 관리와 제도 보완 또는 확충을 지속할 것이란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 개방된 중국 자본시장은 우리에 기회다. 최대 무역수지 흑자국가로 우뚝선 중국의 성장률과 자본투자 여력만 봐도 그렇다. 뒷일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잘 모르는 것에 '묻지마식' 투자는 경계하는 게 맞다. 2007년 차이나펀드의 뼈 아픈 과거를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면 중국에 대한 선행적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금투업계 대표 '중국통'으로 꼽히는 한 대형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국내 금융투자업계의 중국 증시 접근능력이 여전히 10% 수준에 못 미치는 '초보단계'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개방 중국증시가 우리에게 엄청난 투자기회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정보가 제한적인 외국인이 뛰어들기엔 중국은 너무 크다"며 "어느 정도 축적된 분석을 다시 한 번 공부한 뒤 투자하는 것도 늦지 않다. 외국계 증권사들이 국내 블루칩(대형주) 위주로 투자하는 것도 축적된 분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후강퉁 이후 급등과 급락이 반복됐던 부분, 무분별한 증시부양으로 신용규제가 한없이 완화돼 주가조작이 가능했던 때가 먼 일의 얘기가 아니다. 중국 정부당국의 서킷브레이커 제도 도입 후 지레 겁먹은 투자자들의 환매가 이어지며 연일 하한가 종목이 속출한 일도 최근의 일이다. 한 중국증시 전문가는 "중국증시는 아직 건강한 주식시장이 아니다. 성숙한 시장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장기 성장을 위한 과정은 신중할 수록 좋다. 과도한 기대감에 취해 성장 이면의 과열과 거품 등 부작용까지 미리 나서 감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금투업계의 중국증시 상장기업에 대한 일상화된 공부, 그리고 정기적인 리포트 발간이 요구된다. 투자자들의 안전은 뒤로 한 채, '묻지마 투자'를 유도했던 관행은 다시 한 번 되돌아볼 때다. 차현정 증권부 기자


'보수 아이콘' 김기춘 실장의 말로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던 7일 최순실 국정조사 2차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멀게는 자그만치 유신시대부터 불과 엊그제까지 보수 또는 수구세력의 히어로이자 아이콘이라 불렸던 이가 무능력자 흉내를 내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동정을 구하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전반부 '왕실장'으로 불리며 국정을 쥐락펴락했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누구인가? 지난 1964 검사로 임관해 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한 뒤 2년 뒤인 74년 30대의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역임했다. 이어 81년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22대 검찰총장을 지냈고, 92~92년엔 법무장관까지 지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력을 가진 거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공작을 주도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음습한 중정시절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지난 1991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부산 초원복국 사건 등에서 주역으로서 유감 없이 역량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15, 16, 17대 총선에서 내리 3선을 하면서 국회 법사위원장을 역임하며 보수정치세력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가 법사위원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할 당시 보여준 단호함 또는 표독스러움을 기억하며 아직도 치를 떠는 이들이 많다.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그야말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기춘대원군', '왕실장'으로 불리며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청문회 내내 거론됐던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만 봐도, 그가 얼마나 종횡무진으로 권력을 휘둘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공작능력은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행정부를 넘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사건, 야권 인사 고소·고발 등 사법·입법부를 가리지 않았고, 언론길들이기, 민간기업 인사까지 마수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살아온 인생이 이러하다면 김 전 실장은 청문회에서 그렇게 비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됐다. 대통령도 제대로 못만나고, 문고리3인방에 차단돼 보고도 제대로 못받으면서 무능하게 자리가 꿰차고 앉아 있었던 '뒷방 늙은이' 코스프레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확신과 결기를 가지고 청문위원들에 당당하게 맞서는 게 차라리 그 다웠을 거라는 얘기다.  압권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청문회 내내 족히 100번은 "최순실을 몰랐다"고 믿어달라고 하던 그는 네티즌이 제보한 피할 수 없는 영상증거가 제시되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보니까 최순실 이름을 내가 못 들었다고 말할 순 없다. 죄송하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참으로 딱한 말로가 아닐 수 없다. 이우찬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