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등대' 재현에 촉각…재택 양극화도 불만
IT·게임업체 111곳 중 84곳 포괄임금제
실적 악화 이유로 재택근무도 축소
고용 불안에 노조 설립 줄이어
2023-05-01 09:00:00 2023-05-01 09:00:00
[뉴스토마토 김진양 기자]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를 아시나요? 오징어를 잡기 위해 한밤 중 환하게 불을 밝히고 망망대해를 향해 출항하는 배처럼, 모두가 퇴근을 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야 할 심야 시간에도 불을 밝히고 있는 판교의 IT·게임 기업들을 빗댄 단어입니다. 유사한 개념으로는 구로·가산디지털단지를 지칭하는 '구로의 등대'도 있지요. 
 
지난 2018년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면서 오징어잡이 배는 잠시 자취를 감췄습니다. '크런치 모드'라 불리는 강도 높은 노동 환경에 근로자들의 과로사가 이어지면서 초과 근무를 할 수 없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최근 구로와 판교의 IT 근로자들의 걱정이 늘고 있습니다. 주당 최대 근로 시간을 69시간까지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이 추진되면서 오징어잡이 배가 돌아올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오세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 위원장(네이버 노조 '공동성명' 지회장)은 "69시간으로 상징되는 정부의 개편안은 결국 특정기간 초장시간 노동, 즉 '크런치 모드'를 전 산업에 확대하겠다는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그 배경에는 대부분의 IT·게임기업이 채택하고 있는 '포괄임금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난 3월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가 111개 IT·게임 기업 소속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4곳(76%)이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중 39곳(46%)의 근로자들은 "심각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응답했습니다. 포괄임금제에서는 사용자가 초과 노동에 대한 수당을 지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동시간을 제대로 측정하거나 줄일 이유도 없는데요. 주52시간 근로제에서도 근절되지 않은 장시간 노동이 주69시간으로 확대된다면 더욱 당연시 될 것이란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3월 주69시간 장시간 노동, 크런치모드 방지를 위한 IT노동자와의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나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재택근무가 보편화 됐는데, 기업들이 경기 둔화에 따른 실적 악화를 이유로 들며 '오피스 퍼스트' 기조로 전환하고 있는 점도 업계 근로자들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입니다. 넥슨, 엔씨소프트 등 주요 게임사들이 지난해 6월부터 사무실 출근 체제로 전환을 했고 카카오 공동체도 지난 2~3월 근무 체제를 변경했습니다. 상시 재택근무와 워케이션을 내세웠던 야놀자 역시 돌연 재택근무를 종료해 직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재택근무를 철회하는 기업들의 입장은 한결같습니다. 재택근무로 생산성이 떨어진데다, 엔데믹과 함께 찾아온 글로벌 경기 침체에 허리띠도 졸라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게임사들이 장기화된 재택근무로 신작 출시가 지연되는 고충을 겪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일련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직원들의 의견은 배제됐다는 사실입니다. 카카오 노조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진행된 수 차례의 업무 체제 개편에서 직원들은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야놀자 일부 직원들은 근무형태 변화의 이유로 '경쟁사와의 성과 차이'를 꼽으며 "경영진이 책임져야 할 문제에 직원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들은 "상시 재택근무 때문에 이직을 했고, 집도 지방에 구했는데 갑작스러운 지침 변화에 당황스러울 따름"이라고 토로하는데요. 회사 측은 출퇴근이 어려운 직원들에게 1년의 유예 기간을 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안에 출퇴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직 밖에 답이 없습니다. 더욱이 IT업계에서도 여전히 '풀리모트 근무제'를 포함한 재택근무를 유지하고 있거나 주4.5일 근무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곳도 있어 근로환경 양극화에 허탈감을 호소하는 근로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카카오 노조 '크루유니언'은 원칙없는 근무제 변경으로 직원들의 피로감이 크다고 호소했다. (사진=크루유니언)
 
이렇다보니 상대적으로 노조의 입김이 적었던 IT·게임 업계에도 노조 설립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긴축 경영의 여파로 고용이 불안정해진 환경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지난달에만 엔씨소프트, 구글코리아에서 노조라 결성됐습니다. 애플의 한국 지사 애플코리아 직원들도 조만간 노조 설립 총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2018년 네이버를 시작으로 넥슨, 스마일게이트, 카카오 등에서 연달아 노조가 만들어졌던 행렬이 다시금 재현되는 모습입니다. 올 1월 기준 카카오 노조 '크루유니언'에는 본사 사원 수(지난해 기준 3901명)의 절반에 가까운 1900명 이상이 가입을 했고 네이버는 본사 직원 중 40%, 넥슨은 35%가 노조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임단협 외에 다양한 근로 환경 개선 이슈에서 직원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근로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이직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고용 한파가 몰아친 최근에는 단체행동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다른 대형 게임사들로 노조 결성 움직임이 확대될 지 주목된다"고 전했습니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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