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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태일이’, 우린 그에게 너무 큰 빚을 지고 있다
19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 ‘전태일 열사’ 삶, 그의 변화와 선택
불평등·불합리 ‘노동문제’→현실과 타협 아닌 현실의 변화 선택
2021-11-16 00:00:01 2021-11-16 13:32:18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그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를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숭고함그리고 희생등 수식어 들이다. 하지만 이건 사실 그의 존재를 옥죄는 또 다른 사슬이 일 뿐이다. 그저 그도 평범한 청년이었다.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시대가 그를 만들었다그리고 시대를 대표하는 저항의 정신이었다등 표현은 어찌 보면 그의 순수했던 마음을 희석시키는 거짓일지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순간 계단에서 라이터를 들고 앉아 있었다. 그 라이터를 바라보던 눈빛이 너무도 무겁게 짓눌러 왔다. 그 눈빛 어디에 대의가 담겨 있고, 어디에 사회 변혁의 큰 뜻이 담겨 있었단 말인가. 이제 겨우 스물 두 살 청년이었다. 당연히 그는 무서웠을 것이다. 너무도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온 몸에 불을 당겼다. 시대를 바꾸기 위한 희생이니 뭐니. 그런 찬사로 이 청년의 아픈 죽음에 훈장을 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시대가 그를 등 떠 먼 것이다. 시대가 그에게 온 몸에 불을 당기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 태일이속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은 그래서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저 사람답게 즐겁게 웃으며 살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귀족 노조로 불리며 어느덧 정치 세력으로 변질된 지금의 일부 노동조합이 보이는 행태와는 전혀 달랐던 시절이다. 전태일의 목소리가 담은 요구는 너무도 소박했다. 그게 그의 온 몸에 불을 당기게 한 도화선이란 사실이 너무도 참혹스럽고 끔찍했다. 지금 우리는 분명 전태일에게 너무도 큰 빚을 지닌 채 살고 있단 사실을 잊고 지낸다. 그 사실이 더 끔찍했는지도 모른다. 이 청년의 희생 위에서 온전한 안위를 즐기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삶이.
 
애니메이션 '태일이' 스틸. 사진/명필름
 
태일이 1970년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부당한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아주 짧은 삶 동안 누구보다 뜨겁게 싸웠던 청년 전태일 열사의 얘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전태일의 삶 자체를 극화해 그려낸 이 작품은 그 동안 그의 삶을 그려온 여러 다른 작품과 달리 태일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그건 열사란 단어 뒤에 숨겨 진 이 청년의 순수했던 삶, 그리고 우리와 결코 다르지 않던 하지만 우리와는 전혀 달랐던 삶을 살 수 밖에 없던 그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듯싶다.
 
애니메이션 '태일이' 스틸. 사진/명필름
 
지독하게 가난한 삶 속에서도 태일이는 웃음을 잃지 않고 희망을 꿈꾸며 살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미싱사로서 기술을 배우던 그는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더 큰 꿈을 꾼다. 재단사 보조로 취업 했다. 미싱사였지만 지금은 실직한 아버지와 함께 작은 공장을 차려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이 태일이의 꿈이다. 하루 세끼 배곯지 않고 동생들 학업 뒷바라지하면서 가난 때문에 중단했던 자신의 학업도 이어갈 꿈을 꾼다. 지금은 당연하고 또 당연할 수밖에 없던 이런 것들이 태일이에겐 손에 잡힐지 모를 꿈이었단 게 믿겨지지 않았다. 50년 전 대한민국은 그런 사회였다. 정말 그랬었다.
 
애니메이션 '태일이' 스틸. 사진/명필름
 
그저 자신의 꿈을 쫓아 열심히만 살아오던 그의 눈에 다른 세상이 비춰진 것은 재단 보조로 취업한 공장에 출근하면서부터다. 동생 순옥과 동갑내기 나이에 불과한 어린 여공들이 빛도 들지 않고 먼지만 날리는 골방 같은 공장 바닥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풀빵 하나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는 그들의 현실은 끔찍하다 못해 처절했다.
 
태일이가 어린 여공들의 끔찍한 현실에 분개해 노동 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게 불씨는 아니었다. 그는 단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였던 평범했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춰진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가 되고자 했던 공장 주인이 되면 그는 이 끔찍한 현실의 또 다른 지배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태일이는 그래서 고민했을 것이고, 갈등했을 것이다. 그가 되고자 했던 꿈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바꿔보자 노력했던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부터 고쳐야 하는지. 현실과 부딪치고 현실과 대립하면서 그렇게 태일이는 부당함이 무엇인지 배웠고 잘못된 게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다.
 
애니메이션 '태일이' 스틸. 사진/명필름
 
태일이는 불평등과 불합리가 당연했던 시절,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했던 한 사람의 용기를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지금까지 열사란 숭고함을 앞으로 내세운 채 정말 대단한 가치라고 추켜 세우며 봐 오고 있었다. 그런데 전태일이 원했던 시대 정신이 정말 그런 것 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숭고한 희생을 치른 여러 노동 운동가들의 삶이 그걸 원했던 것일까.
 
어떤 수식어도 없이 그의 성씨도 붙이지 않고 그저 태일이란 이름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아마 그런 뜻은 아닐까 싶다. 그 시대를 살아오고 그 시대를 경험한 채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우리의 속마음은 처럼.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이 돼 버린 세상 모두의 태일이가 너무 안쓰러운 세상이 돼 버린 것은 아닐까. 그걸 안타까워 하는 듯했다.
 
애니메이션 '태일이' 스틸. 사진/명필름
 
온 몸이 불 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태일이는 눈물 흘리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그저 아들이고 싶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소박한 밀가루 떡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떠나게 된 그의 삶이 가져다 준 너무도 값진 지금의 삶에 우린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닌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빚을 갚을 길은 태일이란 사람이 있었단 걸 그저 기억해 주면 될 듯하다. 개봉은 다음 달 1.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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