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확실히 2등은 합니다. 굳이 1등이라 얘기하지 않을 뿐이지 내심 저희가 1등일 수도 있습니다.”(웃음)
‘디지털 선급’ 분야에서 한국선급(KR)의 기술 수준을 묻는 질문에 조준호 아태지역본부장은 특유의 유쾌한 화법으로 이같이 답했습니다. 1등이라 말하긴 쑥쓰럽고 2등이라 하긴 억울한 표정이었습니다. 조 본부장은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보였습니다.
지난달 29일 방문한 싱가포르 한국선급(KR) 사무실에서 조준호 아태지역본부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지난달 29일, 싱가포르 핵심 금융·상업지구인 래플스 플레이스 일대 세실 스트리트에 위치한 한국선급 아태지역본부를 찾았습니다. 금요일 오후지만 사무실은 텅 비어 한산했습니다. 조 본부장은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밤낮, 주말 없이 24시간 선박 검사를 나가야 해 직원들 대부분이 현장에 투입돼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의 적막감 뒤로 치열한 현장감이 드리워져 있는 듯했습니다.
그가 건넨 ‘2등론’은 시장을 선도하는 디지털 선급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조 본부장은 “냉정하게 말해 글로벌 메이저 선급 간의 기술 격차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어 누가 먼저 신기술을 내놓든 금방 상향 평준화된다”며 “결국 시장의 승패는 고객 요구에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대응하느냐에 달렸고 KR은 속도전과 정확성에서 세계 최고라 확신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선박관리회사 정조준…‘입소문 전략’
KR 아태지역본부가 위치한 싱가포르는 전 세계 선박 급유량의 3분의 1 이상을 책임지는 최대 벙커링 항만입니다. 1981년 지부 설립 이후 인도부터 홍콩, 호주까지 8개국 16개 사무실을 거느린 아태본부의 핵심 고객은 진짜 큰손인 ‘선주’를 대신해 배를 굴리는 ‘선박관리회사’입니다. 조 본부장은 “싱가포르는 전 세계 선박 관리업의 중심”이라며 “신조 발주 단계의 기술 검토부터 선원 교체, 유지보수 등 막대한 운영 자금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거대 선박관리회사 본사들이 싱가포르에 대거 포진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KR은 앵글로이스턴(Anglo-Eastern), ESM(이그제큐티브십매니지먼트) 등 글로벌 최고 수준의 선박관리회사들과 굳건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핵심 의사결정권자들을 겨냥한 입소문 전략이 영업의 열쇠입니다. 그는 “선박관리회사 임원 등 이른바 업계 ‘빅마우스’에게 빠르고 정확한 서비스로 신뢰를 얻으면 이들이 선주에게 선급 교체를 강하게 제안하는 구조”라고 귀띔했습니다.
취임 100일을 맞은 조 본부장은 과거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097230)) 기술 영업을 담당하며 현장 감각을 익혔고, 2011년 KR 입사 후 줄곧 영업 일선에서 굵직한 계약들을 이끌어온 베테랑입니다. 전 세계 메이저 선급들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인 싱가포르에 그가 사령관으로 투입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 본부장은 아태지역본부 조직 관리 전반을 책임지는 동시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주요 거점을 직접 뛰며 신조선 발주와 입급선 유치를 지휘하는 영업 총괄 사령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KR 아태본부 입구에서 조준호 본부장(왼쪽)과 김양일 싱가포르 지부장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무인 선박에 맞춤형 AI…‘AX 속도’
아태본부가 추진하는 디지털 선급으로의 도약은 국가 주도로 첨단화와 데이터 센터 구축을 꾀하는 싱가포르 현지 흐름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싱가포르는 단순 물류 거점을 넘어 항만 인프라 전반에 인공지능(AI)과 무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조 본부장은 “싱가포르 국방과학기술청과 소형 무인 선박을 띄워 앞바다를 순찰하게 하는 자율운항 방안을 협업 중”이라며 “국가적 AI 도입 기조 속에서 KR의 첨단 기술이 현장에 활발히 접목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드론과 인공지능(AI)이 맹활약 중입니다. 가스 질식 우려가 큰 밀폐 화물창 검사 시 사람 대신 드론을 선투입해 위험 요소를 파악하는 기술은 기본이 됐습니다. 방대한 국제 해사 협약을 다루는 자체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KR CON’에 AI 질의응답 기능을 탑재해 규정 해석의 편의성도 대폭 높였습니다. 보안을 중시하는 대형 선사들을 위해,
HMM(011200) 등 고객사가 원할 경우 해당 선사의 자체 내부 데이터만 따로 학습시킨 맞춤형 AI 챗봇 ‘마리노트’를 독립적으로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선박 사이버 보안 영역에서도 KR의 디지털 역량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선박의 디지털화로 해커 침입 등 치명적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국제선급연합회(IACS) 차원의 공통 규칙이 적용되고 있어서입니다. KR은 선사들이 자체적으로 사이버 위협을 사전 진단하고 방어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돕는 종합 플랫폼 ‘CRP(Cyber Risk Platform)’를 이르면 이달 오픈할 예정입니다.
국제 해사 협약을 다루는 자체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사진=KR)
벙커링 1번지, ‘탈탄소’로 승부수
국제해사기구(IMO)와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 강화로 선사들은 매년 선박의 연료 소모량과 항해 거리, 화물 적재량 데이터를 취합해 보고해야 합니다. KR은 선사들이 제출한 이 방대한 운항 데이터를 오류 없이 검증해 주는 탈탄소 규제 대응 프로그램 ‘기어스(GEARs)’를 내놓으며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선박의 미래 운항 효율을 예측하는 ‘파일럿’과 ‘파워’ 플랫폼도 연달아 선보였습니다. 조 본부장은 “이 배가 어떻게 운항하면 연료를 얼마나 쓸지 예측하고 선박에 특정 장비를 부착하거나 개조했을 때 비용과 투자금 회수 기간이 얼마나 될지 시뮬레이션해 주는 프로그램”이라며 선주들의 의사결정 불확실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탈탄소 흐름은 아시아 해운 허브인 싱가포르의 생존 전략과도 직결됩니다. 조 본부장은 “전 세계 선박 급유의 3분의 1 이상을 싱가포르에서 하고 있다”며 “어떠한 연료로 패러다임이 바뀐다 하더라도 싱가포르는 벙커링 중심 항만으로서의 역할을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이어 “이 때문에 싱가포르 현지에서는 메탄올, 암모니아, 액화천연가스(LNG) 등 이중 연료 및 대체 연료 벙커링에 대한 안전 규칙을 만들고 테스트하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며 “KR은 다른 메이저 선급 및 현지 이해관계자들과 적극적으로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끝>
*이 기사는 (재)바다의품과 (사)한국해양기자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싱가포르=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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