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편지의 수신자와 발신자는 대개의 경우 짝을 이룬다. 명시된 수신자가 아니라면 편지를 개봉해 읽는 것은 숨어서 남몰래 해야할 비밀스러운 일이 된다. 편지 읽을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제3자의 위치는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서 애매하다. 수신자와 발신자의 특정한 관계에서 소외된 제3자가 편지 행간에 숨은 뉘앙스까지 알아채기란 불가능하며, 편지를 오독할 확률도 꽤 크다.
이같은 여러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극단 동네방네는 제3자의 입장에서 연극이라는 형식을 빌어 타인의 사적인 편지를 공개된 장소에서 소리내어 읽는다. 연극 <달아나라, 편지야>의 주인공은 수신자에게 가 닿지 못한 편지 8통이다. 수신자와 발신자의 생존 여부마저 불분명한 상황에서 발 없는 편지를 대신해 4명의 화자가 무대에 오르고 편지에 담긴 마음을 육화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무대 뒤편 스크린과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공개되는 편지는 이흥환이 엮은 책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편지들은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 모여 들었고 미군의 북한 점령 당시 노획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창고에 수십년간 비밀리에 보관되다가 77년 세상에 공개됐다. 올해 4월 한국 땅에서 기자 출신인 이흥환에 의해 공개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30여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했다.
이흥환이 편지를 꺼내어 보였다면 극작가 정영훈은 섬세한 언어로 편지에 담긴 마음을 읽어낸다. 60여년 만에 타인을 대신해 편지를 읽는 이의 마음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작가는 발신자의 마음 대신 행여 자신의 마음을 읽을까 경계하며 화자 4명의 입을 빌어 발신자의 언어 주위를 끊임없이 맴돈다.
먼저 진득한 눈과 마음이 가 닿는 곳은 '그리하여'라는 단어다. 연극 <달아나라, 편지야>는 문법에 서툰 농부가 전쟁통에 매제에게 쓴 안부편지 속 '그리하여'라는 단어를 끝끝내 곱씹고 어루만져 마침내 '너의 안부가 나의 안부와 매여있음'을 읽어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당신'이라는 2인칭 단어의 달콤함과 애틋함을 읽어낸다. 작가의 눈을 따라 관객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무럭무럭, 부디부디'라는 부사어에, 아버지의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라는 영탄조의 문장에 실려 있음을 읽게 된다.
조심스러운 태도는 연출가와 배우가 빚어낸 무대에서도 드러난다. 무대는 애써 꾸민 흔적 없이 단촐하다. 중앙에 놓인 자그마한 우체통, 그 주변의 간이탁자 하나, 양 옆에 놓인 몇 개의 큐브, 바닥에 깔린 얕은 단상들, 관객석 쪽에 놓인 피아노 한대가 소품의 전부다. 무대 뒤편에 투사되는 영상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다양한 필체의 원본편지 외에 50년대 한국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영상이 담기는데 모두가 일상적인 가정의 풍경이다. 부모는 아이를 업고, 가족이 한데 둘러앉아 밥을 먹고, 아이가 동생에게 바가지로 물을 먹이는 소박한 풍경이 빛바랜 채 흐른다.
흰색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배우들은 동작보다는 화술 중심의 연기를 펼치며 편지 발신자의 단정한 대리자로서 역할한다. 무대의 이곳저곳을 서성이며 편지를 소리내어 읽고, 스크린에 투사된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편지를 접어 다시 부친다. 편지 쓴 자의 마음을 읽고 마음을 부치는 행위가 이 공연의 핵심이자 전부다. 극은 단어와 문장만 남은 사람의 흔적을 무심코 흘리지 않고 그때 그 시공간에 존재했던 마음의 세계를 다시 구축해낸다. 잠시 그들이 고여있던 시공간을 다시 살아내는 이 공연은 제의적 성격을 띈다.
만든 이의 마음이 담긴 공연 <달아나라, 편지야>은 연극의 윤리성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혹자는 어딘가 심심하다고 말할 지 모르나 '편지 속으로 나를 밀어넣어, 편지를 나로 살게 하고 싶다'는 이들의 돌직구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다만 배우들의 북한 사투리가 다소 어색한 점, 편지에 대한 화자의 생각과 감정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지점을 분명히 읽어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제작 극단 동네방네, 구성·창작 정영훈, 연출 유환민, 출연 김종태, 이상민, 이새별, 최희진, 영상 박영민, 연주 김지은, 미술 최수현, 협찬 도서출판 삼인. 15일까지 CY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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