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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감정노동자 일상 통해 자본주의의 가면을 벗기다
연극 <불멸의 여자>
2013-04-19 18:00:04 2013-04-19 18:02:30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실제 자기가 느끼는 감정과 무관하게 조직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지니고 행하는 노동을 ‘감정노동’이라고 한다. 감정노동자는 백화점이나 마트, 콜센터, 은행 등 우리 ‘고객님’들과 늘 가까운 곳에 있다. 
 
2013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인 <불멸의 여자>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최전선에 서 있는 계약직 감정노동자를 극의 소재로 삼는다. 극은 계약직이라는 설정을 통해 세상 끝날까지 영원할 것만 같은 사회의 계급 구도를 언급하고, 감정노동자를 통해서는 겉보기에만 번드르르한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공연의 주 무대는 대형 마트 내 ‘앙주 가르디앙’ 화장품 코너다. 수호천사라는 뜻의 브랜드 이름과는 사뭇 다르게 이곳에는 종업원들을 보호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 비정규직 여자 직원 정희경과 윤승아는 틈나는 대로 ‘스마일’을 연습하며 고객 응대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미스터리한 두 여자 고객의 등장으로 생애 최악의 하루를 맞게 된다. 자상한 남자 지점장 김상필이 등장하지만 알고 보면 그 자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들을 성노리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 밝혀진다.
 
무대 뒤쪽 위편의 무대 장치는 이 극의 부조리극적인 면모를 암시한다. 매장 위치를 지시하는 팻말이 어지럽게 놓여 등장인물들의 출구 없는 미래를 암시한다. 팻말은 생선코너, 의류매장, 도서매장, 고객만족센터 등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지만 막상 출구는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배치돼 있다.
 
마트 내에서 점원과 고객 사이 벌어지는 실랑이가 이 어지러운 팻말과 닮아 있다. 한참 동안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그 어느 누구도 만족할 만한 해결점을 얻지 못한다. 건재한 것은 CCTV로 모든 상황을 감시하고 있는 대형 마트 건물 하나뿐이다.
 
'불멸의 여자'는 무대 위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자 인물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웬만해서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인물군을 대변하고 있다. 그 중 특히 고객으로 등장하는 ‘황정란’과 ‘최지은’이라는 두 캐릭터가 눈에 띈다. 고객으로 가장하고 화장품 코너를 방문한 두 인물 모두 이곳에 만연한 가식을 벗겨내고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극의 재미 중 상당부분이 '진상고객' 황정란의 사소한 꼬투리잡기에서 나온다. 황정란은 매장 직원의 사소하고도 의례적인 거짓말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웃고 있는 모습까지 트집을 잡는다. 그러나 관객마저 스트레스 상태로 몰고 가는 그녀가 알고 보니 자본주의 사회의 최하단에서 폐기처분 되기 직전의 상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극 말미에 이르면 매장 직원의 습관적 가식은 자본주의의 천박한 모습이며, 끊임 없이 진실을 좇는 황정란의 모습이 오히려 정상적으로 비춰진다. 황정란이라는 캐릭터의 설득력은 배우 강애심의 열연 덕분에 십분 커진다.
 
최지은은 매장 여자 직원들로 하여금 뼈 아픈 진실을 알리고 받아들이는 계기를 제공한다. 지점장의 부인인 최지은은 여직원들에게 신분 상승을 위해 딛고 올라 갈 사다리처럼 보이는 김상필이 사실은 거대 조직의 신분상승 사다리에서 내리막을 걷고 있는 좌천된 인사라는 것을 알린다. 이어 남편의 지저분한 여성편력에 휘둘려 놀아나고 있는 여직원들에게 폭언을 내뱉으며 어쩔 수 없는 하류 인생이라고 꼬집는다.
 
이처럼 <불멸의 여자>는 설득력 있는 캐릭터 구축, 사회적 부조리를 짚어내는 안목이 돋보이는 극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서사양식의 충돌, 다소 감상적·교훈적으로 흐르는 도입부와 결말 처리로 아쉬움을 남겼다.
 
극의 도입부분은 마트 직원들이 주고 받는 일상적인 대화 중심으로 진행돼 사실주의 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다 중반부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여자가 과연 누구인지 관객으로 하여금 추리하게 하는 미스터리적 구조로 진행된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앙주 가르디앙' 매장 내 놓인 수호천사 상을 활용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으며 표현주의적인 분위기를 내비친다.
 
두 여직원이 극 중 수미쌍관형으로 인수봉에 오르자고 약속하는 대목, 하지정맥류로 고통받는 모습 등이 다소 설명적으로 다뤄지는 점도 아쉽다. 착한 분위기의 도입부 및 결말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진행되는 중반부 사이 괴리감이 다소 크다.
 
작 최원석, 연출 박찬진, 출연 강애심, 강명주, 이승영, 이은정, 서지유, 21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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