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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찾아오는 환자들, 나가려는 의사들
대한민국 의료의 아이러니
2015-05-29 09:59:50 2015-05-29 09:59:50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최근 캐나다의 CBC뉴스는 흥미로운 기사를 내놨다. 보도에 따르면 BC주 밴쿠버에 거주하는 캐나다인 게르트 트루벤바크(남·71세)씨는 애보츠포드 병원에서 목 부위의 암 진단을 받았다. 암 덩어리는 빠르게 자라고 있었고 세균감염까지 돼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가 받은 치료는 상처를 덮는 드레싱이 전부였다.
 
2014년 8월 병원에서는 그에 대한 퇴원 조치와 함께 그를 BC주 암협회(BC Cancer Agency)에 의뢰했다. 그는 협회로부터 종양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3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암 진단을 받은 8주 후에야 종양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렵게 만난 주치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종양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암은 빠르게 커져갔다.
 
캐나다 의료시스템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한국인 아내의 권고에 따라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가 대구의 경북대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암 덩어리는 직경이 20cm로, 불과 한 달 전 애보츠포드 병원에서 퇴원할 때 8cm보다 2배 이상 커져 있었다.
 
그는 지난해 9월 손진호 교수로부터 12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그의 암은 4기로 판명 났지만 수술 후 방사선치료와 화학요법치료를 잘 견뎌냈고, 건강한 모습으로 캐나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인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행운은 그뿐이 아니었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아 약 15만 달러의 치료비 중 8000 달러만 부담하면 됐다.
 
필자가 경험한 사례도 유사하다. 수년 전 경제적으로 꽤 여유 있는 집안의 35세 캐나다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우연히 팔에 전이된 암(metastatic cancer)이 발견됐지만, 캐나다에서 종양내과 전문의를 만날 때까지 3주를 기다려야 했고, 전문의 권고로 CT촬영을 위해 다시 3주를 기다려야 했으며, 결과가 나온 후 다시 그를 만날 때까지 2주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의사는 CT 결과를 본 후에 원발성 암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없다며, 또 다시 검사를 지시했다.
 
절망에 빠진 부부는 지인으로부터 필자를 찾아가 보라는 말을 듣고 가방 하나만을 들고 무작정 한국으로 날아왔다. 필자는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바로 다음날 예약진료를 부탁했고, 환자는 진료 당일 최종진단이 내려졌다. 원발성 암은 다름 아닌 위암이었다. 캐나다에서 두 달 동안 진단되지 않았던 병이 한국에 온 지 하루 만에 확정 진단된 것은 유연한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 덕분이다.
 
이미 처음부터 전이된 암, 즉 말기 암이었기 때문에 수술 없이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비교적 잘 견뎌냈지만 전이된 암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안타깝게 약 8개월 후 사망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깊은 감사를 표했다.
 
OECD 발표 자료에 의하면, 캐나다에서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1개월 이상 기다리는 비율은 평균 60%다. 의료복지가 발달했다는 북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50% 내외이고, 호주와 뉴질랜드가 40% 내외, 그리고 가장 양호한 스위스와 독일이 20% 내외다. 수술을 받기 위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는 비율은 캐나다와 유럽 국가들이 20% 내외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특정 의사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전문의 진료는 대부분 즉시 가능하다. 특히 집 가까운 동네에서 훌륭한 전문의를 우리나라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 의료 접근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13년 다국적 여론조사기업 입소스가 15개 선진국 1만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가별 의료서비스 만족도에서 우리나라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조사항목 전체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의사의 직업 만족도는 어떨까. 나라별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 비교조사는 흔치 않다. 2008년 화이자 제약은 13개국 1741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고, 그 결과를 세계의사협회 특별포럼에서 발표했다. 당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의사의 79%가 의료업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고, 직업 만족도는 13개 나라 중 12위로 나타났다. 단순히 표현하면, 우리나라 의료는 환자는 만족하고 의사는 불만족하는 시스템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가장 불만족하는 부분은 정부의 치료 간섭이었다.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판단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한 치료를 보험사나 정부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나라 의사의 84%가 '항상' 또는 '자주'라고 답했고, 이 수치는 세계 평균 28%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지금 대한민국 의사들은 탈출구를 찾고 있다. 탈출하려는 지역도 과거에 선망하던 미국, 캐나다를 넘어 중동과 중국, 아시아 국가들까지 넓혀지고 있다. 의료 공급이 크게 부족한 중국이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손을 내밀 때, 우리 정부는 의사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가진 대한민국 의사들이 원하는 것은 '보호'(교과서적 치료를 할 수 있는 환경)와 '존중'이다. 지나친 욕심일까.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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