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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지 못해서 증말 죄송합니다
2016-10-27 09:50:06 2016-10-27 09:50:06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2002년 12월부터 이듬해까지 방영한 올림포스 가디언에서 디오니소스가 오르페우스에게 한 대사다. 어릴 때엔 몰랐지만 다시 보니 인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대사와 연출 때문인지, 혹은 오르페우스의 리라에서 나오는 전자기타 소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면은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임져”라는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다.
 
디오니소스가 오르페우스에게 늦게 도착해 흥을 깼다며 “책임져.”라고 말하는 장면이 임신테스트기를 든 모습으로 패러디 됐다. 사진/SBS '올림푸스 가디언'
 
속도위반 혹은 혼전임신은 한국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소재다. 여자 혼자 임신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남자에게 알린다. 그 후에 여자는 갖은 협박을 홀로 견디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다. 돈 봉투를 쓰윽 내미는 시어머니나 자기는 책임질 수 없다고 선을 긋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그러게 책임지지 못할 짓을 왜 저질렀냐며 ‘책임감 없는 남자’를 비난하기도, ‘몸조심을 하지 못한 여자’를 책망하기도 한다. 
 
이성간의 성관계는 임신가능성을 항상 내포한다. 이를 인지하고 임신을 하더라도 책임질 수 있는 여건을 갖춘 후에 성관계를 갖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임신 가능성이 있으니 이성 간 삽입성교를 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욕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를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이럴수록 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정확한 피임법을 교육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성교육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수치상으로도 드러난다. 2014년 여성가족부에서 주관하고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진행한 청소년유해환경 접촉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고등학생의 성교육 연간 경험률은 71.6%, 초등학생의 경우 90.5%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성경험이 있는 학생들의 경우 피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여학생은 40%, 남학생은 45%로 조사되었다. 
 
대학생들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간호과학회에서 발행한 대학생들의 성행동 및 피임지식과 태도에 관한 연구에서는 성교 경험이 있는 학생들 중 89%가 피임을 했다고 응답했으나 그 방법에서 콘돔착용이 58%, 그 외에는 질외사정이나 월경주기법 등을 따랐다고 응답했다. 
 
질외사정이나 월경주기법은 과학적인 피임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를 피임법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피임지식에 대한 질문에서 ‘콘돔 착용 시 앞부분의 공기를 빼고 사용할 것, 발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착용할 것’처럼 피임도구의 구체적인 사용방법에 대한 질문에서는 낮은 정답률을 보였다. 개인적인 경험을 미루어보아도 초중고 시절을 모두 합쳐 내가 받았던 성교육이라고는 정자와 난자가 어떻게 만나서 어디에 착상을 한다는 내용뿐이었다. 피임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달라진 바는 없다. 
 
제대로 된 피임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점도 문제지만 성교육이 기존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를 재생산하고 있는 점도 성 평등을 막고 있다. ‘이성친구와 단 둘이 있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는 자리를 알아서 피하거나 가방을 길게 맨다.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전부 교육부에서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에 포함된 내용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성을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는 동물적 본능이지만 여성에게는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성간의 성교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일이지만 임신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몫이 된다.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이러한 사실은 남성은 여성을 책임지는 시혜자, 여성을 남성의 보호 속에서 살아가는 수혜자라는 프레임을 만든다. 성교육이 올바른 성 관념을 제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적 성 관념을 재생산하고 있다. 책임지라는 한 마디 말에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두 볼을 붉히는 모습을 곧바로 연상할 수 있는 건 여성을 남성의존적이라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못해서 증말 죄송합니다.”라는 비꼼은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다. 가부장적 사회가 부여한 성역할을 거부하겠다는 하나의 선전포고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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