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8화)‘1·4후퇴’의 겨울
“밥 짓는 저녁연기 거룩하고 거룩하다”
입력 : 2017-01-01 11:28:22 수정 : 2017-01-01 11:29:38
어린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린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청록집>, 1946)를 처음 만나 반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술 익은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이었다. ‘나그네’는 사실 '목월에게'라는 부제로 조지훈 시인이 쓴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시였던 바, '완화삼'의 한 구절을 따와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芝薰)”을 부제로 삼았다. 붉은 저녁놀이 보이는 듯, 익은 술 내음이 나는 듯,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가 된 기분으로 애송하던 이 시가 일제 말 백성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졌다는 비판적 인식으로 인해 계속 좋아해도 되나, 20대 들어 갈등했던 적도 있었다.
 
‘38선(삼팔선)’이 나눈 것들
식민 통치도 없고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술 익는 내음을 맡으며 저녁놀 물든 마을을 지나가는 나그네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1940년대 한반도 민중의 현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을 잃고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만주로 가거나, 술은커녕 피죽도 먹기 힘든 날들을 겪어야 했던 시대였다. 마침내 그 시대를 지나 해방을 맞았으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지 경계선’으로 북위 38도, 즉 ‘삼팔선’이 그어진다. 자연과 지형지물, 행정구역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땅따먹기’ 하듯 선을 그어 나눠버리니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상황들도 생겼다.
 
밥 짓는 저녁연기 거룩하고 거룩하다
1945년 8월 10일 이전까지
한반도는 하나였다
1945년 8월 10일 이후
한반도는 둘이었다
북위 38도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고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기로 미국이 제안했다
 
< … >
 
한반도의 허리
강원도 인제군 소양강 언덕배기
옛 화전민
너와집 한 채에
북위 38도선이 지나갔다
 
북쪽 경비대가 차지했다
남쪽 경비대가 대들었다
서로 우리 집이라고
우리 땅이라고 외쳤다
공포를 쏘아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묘안이 나왔다
이 집을
아예 허물어버리자
그러자
 
증조할아버지 적부터 살아온
두메산골 너와집이 없어졌다
그 집 주인
임봉술이 영감 62세
손녀 임가시나 14세
두 사람 이불짐 지고 떠났다
 
할아버지는 눈물도 없이 내내 울었고
손녀는 울지 않았다
다시 못 볼
저 아래 소양강을 보았다
(‘너와집’, 16권)
 
하나의 마을이 38선에 의해 둘로 나뉘어 미국과 소련이 그 관할권을 다투거나, 심지어 앞의 시에서처럼 하나의 집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 것도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는 서막이었다. 정치적 이유로 남북을 가르기 위해 인간이 그은 선이―더군다나 그 땅에서 수천 년간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먼 땅에 사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그은 선이―어찌 자연을 가르고 인간을 가르고 삶을 가를 수 있을까. 산 위에, 강물 위에 어찌 금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은 마을을 가르고 가족을 가르고 삶의 터전인 농토와 저수지를 남북으로 갈라버렸다. 38선을 그을 때 자연지물과 행정경계 뿐만 아니라 교통로도 고려되지 않다보니 많은 도로들과 철로들도 단절되었다.
 
38선이 그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그동안―러스크의 회고담에 기초해―3부조정위원회(SWNCC, 미국 국무부ㆍ전쟁부ㆍ해군부의 협의체)의 의장이던 국무차관보 던의 지시를 받은 미국 전쟁부(육군부의 전신) 작전국의 러스크 대령과 본스틸 대령이 1945년 8월 11일 새벽 2시~3시 사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 지도를 놓고 30분 만에 획정해버렸다는 게 일반적인 이해였다. 그러나 전쟁부 작전국장이던 헐 중장과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의 1949년 6월 17일 전화통화 녹취록에 의하면, 38선에 대한 구상은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당시 이미 진행된 것으로 밝혀졌다(이완범, <한반도 분할의 역사 : 임진왜란에서 6.25전쟁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248쪽).
 
또한, 1944년 12월, 3부조정위원회가 일본군의 항복에 대비해 그 점령지역을 미ㆍ소ㆍ영ㆍ중 4개 연합국에 의해 분할하는 ‘일반명령1호’(1945년 9월 2일 발효)를 구상할 때, 한반도의 분할점령도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사료들에 의거해 미국이 1945년 2월부터 이미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준비했고 38선도 준비된 산물이었다는 입장이 근거 있게 설명되기도 한다(앞의 책, 177~367쪽). 38선이 획정된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설들이 분분하지만, 결국 이 38선에 기초해 1953년 7월 27일 수정선이 그어진다. 남한을 배제시킨 채 미국ㆍ중국ㆍ북한이 맺은 휴전협정에 따라 38선은 서쪽 경계가 남하하고 동쪽 경계가 북상해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역이 조정된 새로운 군사분계선(MDL)으로 바뀌었다.
 
66년 전 한반도의 겨울
평화로울 때는 일상적인 모습이 ‘당연시’ 되겠지만 전쟁 중에는 “밥 짓는 저녁연기(가) 거룩하고 거룩하다”. 전쟁과 같은 사회적 상황이 아니라 개인적 상황일 경우에도, 예를 들어 몇 달, 몇 년씩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나 그를 간병하는 가족에게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된다. 1950년에서 195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전쟁의 포화 속에 있던 한반도에는 북진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에 의해 퇴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생명의 항해' 흥남철수작전. 사진/뉴시스
 
1950년 12월 24일
이승만은 마지못해 서울 시민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중공군 인해전술이
다시 서울을 위협했다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한강 이남으로 후퇴명령을 내렸다
 
1951년 1월 3일
새해는 무슨 새해 포부
정부는 부랴부랴 개코로 떠났다
서울 시민 30만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또다시 떠나야 했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
선일인쇄소 막내로 태어난
갓난아기
아직 호적에도 오르지 않은 아기
이름도 짓지 않아
아가
아가
쌀벌레야 쌀벌레야
하고 부르는 아기
 
엄마 등에 업혀
한강 빙판길 건너갔다
 
그렇게 인생의 처음을 시작했다
< … >
(‘1.4후퇴의 아기’, 16권)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28 서울수복이 이뤄지고 한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공산당 중앙과 마오쩌둥 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차원에서 북한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25일 온정리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중국인민지원군이 11월 말 시작된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공세를 거듭함으로써, 한국군과 미군(유엔군)은 12월 초 평양에서 철수하고 12월 중순부터는 흥남에서 철수하는데, 이로부터 1·4후퇴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혼잡이고 혼란이고 혼돈이고 / 온갖 비명 / 여기저기 / 온갖 절규 / 여기저기” 터지는 상황으로, “거기에 절도 강도가 판쳤”고 “이제 서울에는 가난뱅이들 무지렁이들 / 몇십만명 남았다”(‘을지로 1가’, 19권).
 
'생명의 항해' 흥남철수작전. 사진/뉴시스
 
유리창 깨어진 기차를 탔다
얼마나 다행인가
기차를 탔다
타지 못한 몇백명 중
탄 사람 서너 명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일 걸렸다
가다가 서고
가다가 또 섰다
 
가는 동안 이틀 굶은 사람
사흘 굶은 사람
남의 것 훔쳐먹었다
빼앗아 먹었다
빼앗다가 멱살 잡혔다
 
< … >
 
그런 기차 화물차에 피아노까지 싣고 가는
내무부차관 가족도 있다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
뛰어내려
죽은 아이 껴안고 울부짖는 엄마 두고
기차는 갔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노인도
열차지붕 위 아슬아슬 타고 가다가
떨어져 죽었다
 
< …>
(‘노형중 할아버지’, 18권)
 
현재진행형인 전쟁 트라우마
전쟁이 발발한지 66년이 지났으나 그 상흔은 오늘도 국민들의 의식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세대나 전후의 폐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한 세대들에게 레드콤플렉스는 여전히 강력할 수밖에 없다. 현 대통령의 죄과를 부정하거나 혹은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를 보며 ‘빨갱이 나라’(!)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태극기집회’에 나가 “계엄령 선포하라”, “군대여 일어나라” 같은 충격적인 손팻말을 드는 이들 중에는 내 친구의 아버지가 있을 수도, 내 어머니의 동창이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므로 국민의 수만큼 각각의 생각이 있을진대, 서로 의식의 간극이 크다고 해서 적대적이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물며 이 섬뜩한 표어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일으켜 국민의 입을 막고 제2의 광주학살을 저질러도 된다는 몰이성적, 몰역사적인 뜻이라면 통탄할 노릇이다.
 
혹자는 촛불과 태극기로 갈라진 두 집회를 보며 나라(남한)가 둘로 갈라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한다(여담으로, 태극기집회에는 촛불이 없지만 촛불집회에는 태극기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다른 의견들을 모두가 자유롭게 펼치는 것은 불안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단, 이데올로기나 권력에 의한 의식의 조작ㆍ왜곡이 없다면, 또한 근거 없이 비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면―아고라에서 민주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나라는 그 미래가 희망찬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다른 집단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몸싸움을 하는 것은 ‘촛불’의 ‘민주주의’에도 ‘태극기’의 ‘애국’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부모세대의 경험을 무시하고 그들의 발언을 ‘꼰대’의 발언이라 귀를 막아서는 안 되듯이, 장년ㆍ노년층들은 젊은 세대의 역사인식과 판단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이 기술혁명의 시대 속에 성장하면서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경험과 주체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1·4후퇴 흥남철수 그때 몇만명이 모여들었을 때 / 미 해군 LST를 / 100대 1 / 150대 1로 용케” 타고 “못 떠난 사람 몇만명 아득”할 때 “불안으로 공포로 부산까지 실려왔”(‘호수’, 16권)던 피난민들을 잊지 않는다.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건너 / 남으로 / 남으로”(‘1.4후퇴의 아기’, 16권) 가던 행렬과, 달리는 피난열차에서 떨어져 죽은 이들의 전쟁을 기억한다. 또한, 미군의 야전잠바를 염색해 입어야 했고 미군의 PX에서 흘러나온 물자들에 의지해 경제가 돌아가던 시절, 미군부대의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 만든 이른바 ‘꿀꿀이죽’까지 먹어야 했던 시절이 우리 역사에 상처로 자리하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굳세어라 금순아’가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의 가슴에도―물론 직접 겪은 피난민들의 가슴에 견줄 바는 아니나―큰 울림으로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역사를 성찰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역사’란 ‘국정교과서’에 의해 단일하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세월호 참사로 또래 친구들을 떠난 보낸 이 땅의 청소년들은 알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이끌어갈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지금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함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촛불을 든다. 국민의 촛불로 시작된 새해, 2017년에는 그 소망과 염원대로, 위정자들의 범죄가 단죄되고 친일과 유신의 찌꺼기가 청산되기를, ‘침몰하지 않는 진실’이 인양되어 빛 속에 밝혀지기를, 그리하여 이 땅의 역사가 불의한 고통의 질곡에 얽매임 없이 유유자적 구름에 달 가듯이 흘러갈 수 있기를.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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