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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9화)‘청량리 588’과 기지촌의 역사
“가슴 잿더미 벙어리였습니다”
2017-01-09 06:00:00 2017-01-09 06:00:00
한때 대한민국의 대표적 집창촌이었던 ‘청량리 588’의 소멸이 멀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다.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의 제정으로 타격을 받아 점점 쇠퇴해 온 이 지역은 그동안 재개발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말들이 여러 번 나오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그 운명이 참으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588’이 있는 청량리 4구역에 지하 7층, 지상 65층 규모의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서게 되고 그 착공일이 5월 1일이라니, 재개발추진위원회와 주민들 간의 보상금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 이전에 강제철거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반도의 공창과 사창의 역사
한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에서의 성매매의 역사는 1902년 7월 24일 일본의 유곽이 부산에 진출하면서 시작된다(기생ㆍ기녀는 이와 다르다). 즉, 우에노 야스타로라는 자가 부산 부평정 1정목(현 중구 부평동)에 요리를 팔며 성매매를 하는 요릿집을 모아 ‘아미산하’라는 유곽을 만들었는데 280명의 여성들이 거기에서 일했고, 장소가 협소해지자 1907년 8월 미도리마치(현 완월동)으로 이전했다고 한다(이하, 다음의 자료를 참조하였다: 오유석, “동대문 밖 유곽-'청량리 588' 공간 구성의 역사와 변화”, <서울학연구> 제36호, 2009. 8, 101~35쪽). 일본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의 게이세이초를 유곽지대로 공인(공창, 公娼)해 시작되었다하니, 그 역사가 제법 되는 셈이다.
 
부산에서 시작된 유곽은 1902년 12월 인천, 1904년 10월 서울로 확대되어, 1929~30년 당시에는 총 25개의 유곽에 510명(일본인 303명)의 포주와 3170명(일본인 1,789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활동하게 된다. 1947년 11월 미군정청의 ‘공창폐지령’에 따라 성매매가 불법화되지만, 이후 ‘사창(私娼)’으로 오히려 확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당시 한국전쟁은 많은 전쟁미망인들을 성매매 여성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보사부의 ‘접대부 검진표’에 의하면, 성매매를 포함해 전체 윤락여성의 수가 1947년 1만6874명에서 1959년 말 16만7000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되어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윤락행위등방지법’을 선포하지만, 실제로는 1962년 전국 104개소에 집창촌과 기지촌의 ‘특정지역’(이른바 ‘선도지역’)을 설치해 경찰과 당국의 비호 아래 공창의 성격으로 운영하게 하였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집장촌 사이로 시민들이 걷고 있다. 사진/뉴시스
 
‘청량리 588’의 변천
‘청량리 588’의 행정구역인 동대문구 전농2동 일대도 정부의 관리를 받는 ‘특정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지역이 집창촌으로 번성하게 된 것은 1966년 창신동의 한 포주가 ‘선도위원회’를 통해 경찰에 상납하던 장부를 공개함으로써 1967년 창신동 지역에 집중단속이 일어나고 사창가가 결국 폐쇄된 점, 1968년 종로3가를 비롯해 몇몇 적선지대(赤線地帶)(선도 명목으로 양성화한 지역)를 철폐한 점과 관련되어 있다.
‘청량리 588’이라는 명칭은 지번이 전농동 588번이기 때문이라거나 588번 시내버스가 지나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사실 집창촌은 전농2동 620~624번지 일대이고 이곳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568번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래가 무엇이든, ‘청량리 588’은 특히 1970~80년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던 곳이고 그만큼 사연도 많은 곳이었다.
 
청량리 588
거기
먼 중앙선인가
동해북부선인가
그런 야간 완행열차 들어오는
쉰 목청
새벽 기적소리 있는
 
거기
 
오늘밤은 손님 하나도 못 받고
혼자 급체한 아픔 참다가
손톱 밑
깜방 피 한방울 내고
아픔 가라앉는
그 허망한 새벽
 
미자
 
올해 서른다섯인데
숨겨
스물여섯이라며
하룻밤 손님 서넛 받아
숏타임으로
몇천원 받아
포주 언니 바치고
외상값 갚고 나면
또 빈털터리
 
미자
 
본디 강화 교동도 당집에
계모 병구완
약값에 팔려
폐주 연산군 원혼 달래는
처녀 등명(燈明)으로 바쳐졌어
폐주 부군(府君)
그 원혼 부군 앞
무당 푸닥거리
< … >
 
미자
 
너 동두천 갔다가
꺽다리 양놈 싫어 징그러워
청량리 588
여기로 와
진짜배기 숫처녀의 첫날밤
대한청년단 동대문 지부
연락부장 성호동한테 걸려
< … >
 
화대 곱절 받았으나
웬걸
포주 차지였지 다 가로채갔지
 
미자
 
비 오는 날
너 울며
나한테 본명 말했지
내 이름은 미자 아니라고
옥란이라고
배옥란이라고
(‘처녀 등명’, 29권)
 
연구자들이 일제강점기 윤락지대와 철도역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청량리 588’은 중앙선, 경원선, 경춘선이 있는 청량리역 덕분에, 또한 1950년대 전쟁 덕분에, 그리고 1960년대 말 종삼(종로3가)ㆍ양동ㆍ창신동 사창가의 몰락과 인근의 시외버스터미널, 시장들 덕분에 더욱 발전하게 된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역시 사창가에 대한 정화사업과 윤락행위 근절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1980년대가 ‘청량리 588’의 호황기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미관을 위해 ‘환경개선사업’에 들어감으로써 성매매 여성들을 커다란 유리를 통해 직접 볼 수 있게 한 ‘유리방’이 확산된다. 88올림픽 때 절정기를 맞은 이후, ‘청량리 588’은 1990년대 중반부터 도심재개발구역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현재의 철거 위협에 이르게 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지역이 1936년 경성부 행정구역 확대를 위해 실시된 토지구획정리사업 때 경성부로 편입된 곳으로, 일제에 의한 자본주의화ㆍ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한 토막민(土幕民)들, 시골에서 상경한 빈민들이 모여든 곳이었다는 점이다.
 
2015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2차 변론기일 기자회견'에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은 미군 기지촌 위안부문제를 국가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뉴시스
 
 
기지촌의 애환
모파상의 중편소설 <비계덩어리Boule de suif>를 보면,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전쟁을 하던 때 함께 장거리 마차를 타고 가던 프랑스인들―한 명의 공화주의자만 제외하고 그 나머지인, 포도주 도매상, 백작, 공장주와 그들의 “정숙한 부인들” 그리고 두 수녀들―이 ‘비계덩어리’라는 별명을 가진 ‘매춘부’를 억지로 설득해 그녀를 원하는 프로이센 장교와 하룻밤 자게 한다. 그녀를 바쳐 자신들의 안전한 출발을 획득한 이 상류층 부역자들은, 애국심과 위엄 있는 자존심으로 적에게 저항하려 했던 동포 매춘부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그 이튿날 출발할 때 그녀를 더욱 경멸한다. 20세기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기지촌 여성들에게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역군’, ‘애국자’라는 칭송을 보냈고 무의미한 표창장과 감사장을 뿌렸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들을 여전히 경멸했으며 그들의 ‘유효기간’이 끝나자 가차 없이 버렸다.
 
경기도 포천
미군부대 캠프 레이건 입구는
휴전 이래 번성했던 기지촌이었다
바로 이 기지촌이 폐허가 되었다
캠프 레이건이 떠났기 때문
 
그 기지촌 양공주들의 우두머리
리타 김
한국 이름 김옥숙
 
백인 사내 몇백명
흑인 사내 몇백명 상대해주고
캠프 레이건 기지촌 부녀회장이 되어
양공주 지도자에다
포천군 기관장이었다
군수의 표창장 감사장이 벽에 가득
‘조국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군이 떠난 뒤 한국군이 왔다
양공주들 떠난 뒤
< … >
혼자 남은 김옥숙이 폭삭 늙어 병들어
사내새끼란 좆 하나밖에 없는 치사한 물건들이라구
이런 욕지거리조차 그만두었다
(‘캠프 레이건 입구’, 11권)
 
고은 시인은 1969년 잠시 동안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일한 적이 있는데(그의 유일한 직장생활 경험이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민통선을 취재한 후 포천에 있는 캠프 제퍼슨 근처 기지촌에서 “40대 예비역이라고 해도 될 양공주 출신의 술집 주인”, “알고 본즉 포천 기지촌 양공주들의 단체인 백합회 회장”인 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앞의 시―캠프 이름과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지만―에 나오는 감사장의 내용은 바로 그 취재 당시 그가 본 문구, 즉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을 상기했기 때문이리라(<고은전집> 25권, 서울: 김영사, 2002, 284~286쪽). <만인보>에 기지촌 여성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의 통신사 시절의 경험보다는 그보다 훨씬 전, 그가 고향인 군산의 K-8 미 공군기지 부근 기지촌 여성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며 생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지촌이나 ‘청량리 588’에 대한 그의 시들 속에는 그곳의 여성들이 살아왔던 이전의 삶과 현재 살고 있는 고단한 삶이 현실적으로 그려지곤 한다.
 
1940년 노고지리 솟아오르는 이른 봄 초록 보리밭머리 태어났습니다
젖이 모자라
마을 돌며 푸대접 젖동냥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아기거지의 삶이었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 따라 밤품삯일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아기일꾼으로 숨찬 삶에 발디디었습니다
 
전쟁 뒤
열여섯살 제법 아리따웠습니다
조금 웃음 머금어도
보조개가 쌍이었습니다
< … >
 
1956년 여름
저녁 야학당에서 돌아오는 길
지프차 미군 두 놈에게
강간당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하늘도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고향은 감싸주는 곳이 아니라
손가락질하는 곳이었습니다
 
울며
집 떠나
팔자대로 경기도 송탄 미군부대 밖 양공주가 되어버렸습니다
순자가
에레나가 되었습니다
 
화대 내지 않고 패대던
미군 사병 한 놈을 취중살해했습니다
 
무기수 되어
그 동안의 에레나가
다시 순자로 돌아갔습니다
수원
공주
순천 형무소를 전전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한번도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되었다고 떠드는데
그녀의 입은 종일 벙어리였습니다
 
가슴 잿더미 벙어리였습니다
(‘에레나’, 16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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