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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임청각 역사적 의미의 복원
2017-11-17 06:00:00 2017-11-17 06:00:00
중국 후난성 샤오산(蕭山)에는 마오쩌둥의 생가(고거)가 있다. 마오의 생가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당시의 단칸, 그대로 소박하게 복원돼있지만 연중 마오의 혁명 흔적을 찾아나선 ‘홍색관광객’(중국혁명 유적을 찾아나서는 관광을 중국에서는 일반여행과 구분해서 홍색관광이라고 부른다)들이 찾아오고 특히 12월 마오의 탄신을 전후한 시점에는 수천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샤오산 마오 고거는 마오의 집권시절에 복원됐지만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을 뿐 특별히 새로 지은 시설은 없다.
 
마오의 생가와 불과 100여리 떨어진 화밍러우진에는 마오의 위상을 위협하다가 문화대혁명을 통해 숙청된 마오의 혁명동지 류샤오치의 고거도 복원돼 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마오와 류샤오치의 생가를 함께 둘러보는 홍색관광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성공한 혁명가와 마오에 의해 숙청된 혁명동지의 생가를 함께 둘러 보는 것은 중국인들의 홍색관광의 목적이 어디에 있든 간에, 역사적 정치적 의미가 적잖을 것이다. 두 혁명가의 고거 규모는 오히려 소농이었던 마오집안 보다 중농이었던 류샤오치의 고거가 더 컸다. 옛 집 그대로 복원하면서 류샤오치의 생가가 더 커진 셈이다. 물론 류샤오치의 고거는 그가 숙청되면서 한 때 퍠허같은 흉가로 변하기도 했다.
 
두 고거의 차이는 입구에 조성된 기념관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마오의 생가 입구에는 거대한 기념광장이 조성돼있고 마오쩌둥 기념관의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물론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거대한 마오쩌둥 동상도 세워져있다. ‘홍색’ 관광객들은 생가를 둘러본 후 이곳에 와서 꽃다발을 사서 헌화하고 경건하게 참배한다. 류샤오치의 고거 입구에도 류샤오치 기념관이 세워져있지만 마오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된다. 몇 가지 류샤오치의 유물과 혁명흔적에 대한 전시물이 조촐하게 마련돼 있다.
 
1950년대 대기근사태와 문화대혁명을 통해 수천만의 인민을 희생시킨 과오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신중국의 대부이자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마오 사후 ‘문혁’을 끝내고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마오의 공과를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은 채 텐안먼 광장에 걸려있던 마오의 초상화를 끌어내리지 않았다. 스탈린 사망직후 후계자인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에서 벌어졌던 스탈린 격하운동의 파장을 지켜본 중국지도부의 결단이었다. 최근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시대에 대한 반성 등 다양한 기록과 회고 등이 쏟아지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마오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은 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에서의 마오시대에 대한 반성이나 연구가 더뎌지고 있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금기령 때문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마오에 대한 격하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그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인이 마오시대를 그리워하거나 마오를 추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종종 마오가 없다면 신중국도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덩샤오핑시대에 원빠오’(온포)를 넘어 시진핑 주석이 19차 당대회를 통해 2020년 전면적인 샤오캉(소강)사회 구축을 천명하게 된 것도 중국인들은 마오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기고 있다.
 
굳이 중국의 예를 들 필요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온 국민이 존경하는 전직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역사바로세우기’ 혹은 ‘적폐청산’ 등으로 명분은 바뀌지만 같은 결과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이런 것도 민주주의의 당연한 수순이라면 온 나라와 온 국민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늘 만만치 않았다.
 
중국의 동시대 역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의 전직 대통령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안동의 임청각 복원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하고자 한다. 지난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을 언급하면서 임청각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석주 이상룡은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되자 가문의 종택인 임청각을 비롯한 전 재산을 처분,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온 생애를 바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그가 가산을 모두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경상북도는 2016년 석주 선생을 비롯한 경상북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의 자취와 기록을 모아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우고 신흥무관학교 체험장 등도 마련했다.
 
임청각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이런 역사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곳이 일제강점기에 철길이 나면서 두동강이 나 있다는 안타까움이 한몫하고 있다. 임청각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민간 가옥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99칸의 별당형 정자로, 임청각 본 건물은 1963년 보물 182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일제는 석주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9명이나 배출하고 임청각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자 임청각 마당 한 가운데로 철길을 내서 행랑채와 부속건물 등 50여칸을 헐어버렸다. 그래서 현재의 임청각은 집안 한 가운데로 철길이 관통하면서 수시로 기차가 오가는 기이한 모습으로 100여년을 지탱해오고 있다. 수 년 전부터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지역사회가 복원사업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주변 시설 정비를 시작했고 철도 이설공사가 마무리되는 2020년 이후 임청각 복원사업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이 임청각을 언급하면서 복원사업이 큰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안동은 임청각은 물론 저항시인 이육사 기념관이 있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지만 그동안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임청각 복원사업의 핵심은 일제하에 임청각 부속건물들을 허물고 마당을 가로지르며 독립운동의 맥을 끊고자 했던 철도이설일 것이다. 마당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철도와 연이어 가설된 철도 옆의 포장도로 등이 임청각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상류의 도도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복면 역할을 하고 있다. 복원은 원형을 되살리는 사전적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의미의 되살림 두가지가 있다. 현재의 임청각 복원사업의 핵심은 철길을 이설하고 원래 있던 건물을 다시 짓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역할을 했던 임청각을 일제가 훼손하기 전의 본래의 모습대로 되돌리는 것이 후손들에게는 적잖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길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면서까지 독립운동의 맥을 파괴하고자 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잔인한 행태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는 ‘경북선 철도이설사업’이 마무리되더라도, 흉물 그대로의 철길을 임청각 한 켠에 보전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기억하자는 역사적 의미로서의 복원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서명수 슈퍼차이나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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