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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정(情)보다 정의
2017-11-24 06:00:00 2017-11-24 06:00:00
우리말과 관련해서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듣던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정(情)'이다. 정이라는 말은 우리말에만 있으며 그 어떤 나라 말로도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 미운 정, 고운 정, 이웃 간의 정 같은 말은 love나 mind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천만에! 방금 전까지 한국 사람과 '정'에 대해 이야기 하던 미국인이 동료에게 그것을 bond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유대 또는 끈이라는 뜻이다.
 
구글 번역기는 '정들다'를 'become attached'라고 번역한다. 구글 번역기가 여전히 우스운 번역을 자주 하기는 하지만 한-영 번역 수준은 놀라울 정도다. 가끔 한글로 에세이를 쓴 후 구글 한-영 번역기를 돌려본다. 놀라울 정도로 잘 번역한다. 간혹 어처구니 없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살펴보면 내 한글 문장에 문제가 있다. 적확한 표현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국어에 '정'이라는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우리가 정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정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말이다. 성인이 된 다음에 우리는 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상을 당한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조화를 보낸다. 조화가 몇 개만 있으면 좋을 텐데 너도나도 조화를 보내는 통에 도대체 조화를 둘 곳이 없다. 그러면 상주는 꽃은 내다버리고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리본만 벽에 붙여둔다. 상가의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꽃은 없어지고 리본만 남은 것이다. 위로하러 방문한 사람들은 리본의 이름을 살핀다. 본질은 사라지고 연줄만 남는다. 이게 정이다.
 
정은 사람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적 신뢰다. 윤활유는 동력이 원활하게 작동하게 도와주기는 하지만 동력 자체를 제공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정을 나눠줄 수 없다는 게 바로 정의 한계다. 정을 강조하는 사회는 공적 신뢰보다 사적 신뢰가 강한 사회다. 사적 신뢰가 강한 사회는 투명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국제투명성기구가 올해 1월에 발표한 우리나라의 2016년 부패지수(국가청렴도)는 100점 만점에 53점이다. 전 해보다 3점이나 낮아지면서 청렴도 순위도 15단계가 추락하여 전체 조사 대상국 176개 나라 가운데 52위가 되었다.
 
지난 정부 시절 청와대는 정으로 가득한 화기애애한 곳이었다는 게 요즘 재판 과정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는 걸 보면 당연한 결과다. 국가정보원은 나라를 지키는 데 은밀히 쓰라고 특별히 허락받은 특수활동비 수십억 원을 청와대에 정기 상납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수족들은 정 넘치게 나눠 썼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북한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에는 부패가 있다. 부패에도 유형이 있다. 시민들의 경제·정치 참여가 적고 국가의 역할이 적은 곳에서는 독재형 부패가 만연한다. 독재자 한 명이 돈과 권력을 독점하여 배분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그 정점에 있었고 김정은이 그 자리에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족벌체제형 부패다. 국가의 역할이 좁은 사회에서 소수의 족벌들이 경쟁적으로 부패를 벌인다. 러시아 같은 경우다. 그 다음 단계는 엘리트 유착형 부패다. 시민의 경제·정치 참여 압력은 높지만 국가역량이 뛰어나지 않은 사회에서 일어난다. 우리나라가 여기에 해당한다. 시민의 경제·정치 참여 압력도 높고 국가역량도 아주 뛰어난 사회에서는 로비시장형 부패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들의 부패 유형이다.
 
부패의 수준은 다르지만 표현은 모두 같다. 정이다. 정으로 통한다. 정으로 평생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떡값을 주고, 정으로 '축 장도' 또는 '전별금'이라고 적힌 봉투를 주며, 정으로 난을 보내고, 정으로 가방과 자동차를 사주고, 정으로 자리를 준다.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정은 아주 작은 정으로 시작한다. 교사에게 전해주는 책 사이에 끼어 있는 상품권 몇 장, 소소한 선물, 불과 몇 만 원짜리 저녁식사가 그것이다. 철마다 봉투를 들고 학교에 오는 엄마를 보고 자란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자동차 받고 자리 주는 것이다,
 
흔히 김영란법이라고 일컬어지는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지 벌써 14개월이 되었다. 김영란법은 시행되기 전부터 본질에서 벗어난 온갖 비난을 받았다. 분명히 불편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일년 내내 밥 타령을 하는 언론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에 훌륭하게 자리 잡았다. 청탁을 거절하기가 편해졌기 때문이다. 사적 신뢰보다 공적 신뢰가 더 강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이 아니라 정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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