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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화)흰옷 금지의 시대
“이 땅의 흰옷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2018-02-12 08:00:00 2018-02-12 08:00:00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시즌2를 시작합니다. 시즌2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중심을 두고 ‘일상사(日常史)’의 관점에서 민중의 삶에 보다 주목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사회현상과 문화, 시대상과 사회의식을 <만인보>의 시를 통해 다룰 예정입니다.(편집자)

젊은 세대들에게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1970년대의 장발·미니스커트 단속은 60년대 서구 히피문화의 정신, 즉 기성사회의 질서와 규범에 반발해 새로운 가치와 개성을 갈구하는 자유로운 정신이 한국사회에 유입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유신정권에게는 필연적인 통제였을 것이다. 당시 ‘풍기문란’의 잣대를 들이댄 이 단속은 1954년에 제정된 ‘경범죄처벌법’에 근거해 있었는데, 그 법의 전신은 1912년 조선총독부의 ‘경찰범처벌규칙’(법령 제40호)이고 또한 그것의 모태는 1908년 일본의 ‘경찰범처벌령’이니 도처에 뿌리내리고 계승된 식민지의 잔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기록물 전에 전시된 1975년 장발족 단속 모습. 사진/뉴시스
 
‘백의민족’을 둘러싼 논란
역사학 방법론 중 미시사(微視史)와 일상사(日常史)가 있다. 전자는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후자는 1980년대 독일에서 출현했는데, 평범한 개인이나 마을과 같은 소집단의 삶, 개별 대상을 ‘작은 규모’로 연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점에 양자의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단위의 역사는 ‘큰 역사’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굴러가게 하는 톱니바퀴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름 없는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이 속해 있던 한 시대, 한 사회의 특성을 단면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시대와 시대 사이, 사회와 사회 사이를 잇는 역사적 의미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일상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의식주 중 ‘의’를 논한다면, 이 땅 민중의 ‘흰옷’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겠다. ‘백의민족’은 한때 우리 민족의 상징어처럼 사용되어온 말이지만, 그 표현의 기원과 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옛 한국인들의 백의 숭상과 관련해 종종 중국의 고대 사서들이 인용되는데,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의 부여 편은 부여사람들이 나라 안에서 옷을 입을 때 흰색을 숭상하여 흰색 포목으로 만든 통 큰 소매의 도포와 바지를 입는다고 전한다. 한편, <북사(北史)> 권94 신라전은 신라인들이 복색으로 흰색을 숭상한다고 쓰고 있고 <수서(隋書)> 권81도 신라인의 복색이 희다고 기록하고 있다(이 두 문헌은 ‘상백(尙白)’ 대신 ‘상소(尙素)’라고 쓰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의 색 혹은 무색을 뜻하는 소색(素色)은 백색에 포함되었다). 또한 <구당서(舊唐書)> 권199에도 신라인이 흰색 의복을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흰옷을 즐겨 입은 민족이 한민족만은 아니다. 1934년 4월1~7일까지 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된 국어학자 유창선(1905~?)의 <백의고(白衣考)>는 우리 민족의 흰옷에 대한 역사적 고찰로, 저자는 3장의 ‘고대동북아세아 민족의 백의풍속’(4월1일자)에서 여진족, 몽골족 등 흰옷을 즐겨 입은 동북아 민족들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몽골인들의 흰색 숭배는 유명하다. 몽골인들은 자신의 조상을 푸른 늑대와 흰 사슴으로 여겼는데, 돌궐족이나 선비족도 흰 사슴을 조상으로 숭배했다 한다. 신성한 존재인 흰 사슴 숭배사상은 한라산의 ‘백록담(흰 사슴 연못)’에도 설화와 함께 남아 있다. 몽골인은 정월을 ‘짜간 사르(흰 달)’로 부르며 중시하고, 정월 초하루에는 흰옷을 입으며, 흰 선물을 하고 예물은 흰 천에 싼다. 가축의 젖으로 만든 음식인 ‘짜간 이데(흰 먹을거리 즉 유제품)’나,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말젖을 발효시킨 술인 아이락(마유주)도 하늘의 색인 흰색이라 신성하게 여긴다. 몽골인의 집, 게르도 흰색이다.
 
백색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여겨졌다. 백의를입은사람들(1920년대·위), 달항아리(2014·아래). 사진/뉴시스
 
흰옷에 먹물을 뿌린 색의(色衣) 강요
신라인의 백의 애용은 고려에도 이어져 왕족·귀족·평민 할 것 없이 흰옷을 즐겨 입다가 충렬왕 때 태사국(천문·기상·길흉화복·물시계 등을 관할하던 곳)의 건의로 오행(五行)에 따라 백색과 황색 옷을 금지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왕 때 다시 서방(오행의 금)의 색인 백색이나 중앙(오행의 토)으로 여긴 중국의 색 황색을 금하고 동방(오행의 목)의 색인 청색을 권장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백의 금령이 보이지 않고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절 조선땅을 방문한 서양인들에 의해 조선인들의 백의 풍속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다수의 백성이 흰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니 그들에게는 참으로 이색적이고 의아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통제 하에 놓인 대한제국 정부가 강력한 백의 단속을 실행하면서 백성들과 숨박꼭질에 들어가, 단속을 하면 흰옷이 잠시 사라졌다가 얼마 후면 다시 우르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때부터 조선인 스스로 ‘백의인’, ‘백의민족’, ‘백의동포’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1921년 잡지 <개벽>에 ‘백의인’이라는 말이 나오고 1922년 <동아일보>에 ‘백의민족’, ‘백의동포’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박찬승, “일제하의 ‘백의(白衣)’ 비판과 ‘색의(色衣)’ 강제”,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9집(2014.11.), 51~52쪽).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백의’라는 표현이 민족운동의 항일적인 표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동시에 일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신문·잡지에서 백의 습속은 비판되고 색의착용운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관(官)의 주도 하에 백의금지운동이 이뤄지고 ‘색의 장려’에서 ‘색의 강제’로 정책이 강화된다. 이 당시 백의 탄압과 색의 강제에 관련된 신문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비합리적의 백의철폐운동, 관공과의 총출동으로 흰옷에 먹물 총질, 일반 여론 비등. 순사부장 묵총 중지 언명, 낙동농조 대표자에게”(중외일보 1930년 2월16일), “희활극 연출한 색의장려묘법 장거리에서 먹물을 뿌려 해남시일에 흑색우”(동아일보 1931년 3월1일), “숫자로 나타난 백의와 색의착용 이해득실대조. 삼천여만원 비용과 십오만여년 절약, 전조선 인구가 색의를 입으면 가경(可驚)할 색의의 이익. 매일일가족 삽십여경제”(동아일보 1933년 1월29일).
 
백의를 입은 사람들은 장날 시장에서 먹물뿌림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출입을 금지당하고 인부로 채용되지 않았으며 서약서를 제출하고 벌금을 무는 등 여러 가지 제재를 받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종종 신문기사들로 다루어졌다(공제욱, “의복통제와 '국민'만들기”, 공제욱·정근식 편,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2006, 155쪽). 여성들의 치마를 들쳐 흰 속바지에 붉은 물감을 칠하거나 초상을 당한 사람의 베옷에까지 먹물을 칠했다는 보도도 있고(박찬승, 앞의 글, 63쪽), 심지어 먹물칠로 모욕당하고 색의를 입느니 자살을 택한 노인들의 소식도 있다(박찬승, 앞의 글, 65쪽; 공제욱, 앞의 글, 159~160쪽).
 
음란과 혁명(권명아 지음·책세상 펴냄) 일제가 식민지 민중의 일상을 장악하기 위해 마련한 경찰범처벌규칙(1912)이 현재의 경범죄처벌법의 모태다.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풍속 통제의 이념과 법제 및 제도의 틀은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누적되며 진화 발전해왔다. 사진/뉴시스
 
일제의 먹물에서 미군복의 먹물로
식민지의 위치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한국전쟁을 겪은 가난한 민중의 먹물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대천중학교 3학년 졸업하자마자
다른 일에 한눈팔지 않고
막바로 염색소 차렸다
학교 마치고 닷새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야 너 노느니 염색이나 해보아라
그렇게 염색소 차려라 해서
밖으로 낸 헛간 고쳐
드럼통 자른 것으로 염색솥 걸고
거기에 물감 펄펄 끓였다
물감이래야 검정물감뿐이었다
 
술 내고 돈푼 주고 영업허가 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야전잠바 시보리잠바 염색에
미국 사지바지 염색에
흰옷 때 끼어도 모르게
검은 물 들이는 염색에
풋내기 김용국이 바빠졌다
 
그렇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구호물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사람들
흰옷밖에 몰랐다
흰옷에 검정물 들이는 일
꿈도 꾼 일 없다
그런데 검정옷 입기 시작했다
미국 구호물자 들어오며
이 땅의 흰옷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 늘 일감 있겠는가
시골이야 장날이 제일이지
그것도 여름 한 철 지나서야
가을바람 불어야
검정물 들이러 온다
 
미군 야전잠바나
미군복 그대로 입고 다니면
경찰이 빼앗아 벗기거나
먹물이나 잉크 끼얹어버린다
일제 때 흰옷 못 입게 하느라
왜놈이 하던 그대로
먹물 찌크러댔다
 
김용국이야 그저 밥 세 끼 먹을 만치 일했다
더도 낫지 않고 덜하지도 않고
그 염색소가 평생 생업이 될 줄이야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그 자리 제일염색 그대로 있다
< … >
(‘김용국’, 9권)
 
한국전쟁 후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온 옷을 입거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검게 염색해 입던 시절의 우리 모습이다. 군복 바지를 그대로 입으면 단속이 되니 검게 물들여야 하고, 부대에서 나온 군용담요도 염색해 코트로 만들어 입거나 낙하산 천으로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는 것이 유행했다고 하니, 당시 염색집이 증가하고 성업이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의복이나 두발에 대한 통제는 지배세력이 특정 목적을 위해 국민의 자유의지를 사회적으로 구속하는 한 방식이다. 일제강점기의 의복 통제는 그 대표적인 예로, 백의 탄압과 색의 강제가 그러했다. 또한, 일제 말 전시체제의 강화에 따라 군복과 흡사한 남학생의 교복이 ‘국방색’을 강요당하고 남성에게는 국민복이, 여성에게는 일본여성의 근로복인 ‘몸뻬’가 권장되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편, 일제의 국민복은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국민재건복’을 만들었던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한민족의 백의 습속을 염료의 부족과 기술 낙후, 경제적 궁핍과 국가의 통제, 망국의 슬픔과 잦은 국상으로 인한 상복의 일상화 같은 이유로 왜곡했지만, 이는 유창선이 이미 30년대에 <백의고>에서 조목조목 설득력 있게 반박한 바 있다(서봉하, “한국에서 백의호상(白衣好尙)현상이 고착된 배경에 관한 논의 – 유창선의 백의고를 중심으로”, <복식> 64(1), 2014.01, 160~161쪽).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제국의 경찰이 뿌리는 먹물을 흰옷에 맞고, 해방 후에는 미군의 군복바지를 먹물로 물들여 입어야 했으며(일부 사람들은 멋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당시 군복을 물들이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으므로), 70년대에는 길거리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당했고, 80년대에도 남학생은 머리를 밀다시피 짧게, 여학생은 귀밑 1센티미터의 두발 길이를 유지하던 우리의 역사, 그 세월들 속에는 자유의지의 구속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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