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아산과 남북경협)내외 환경 안 맞으면 만드는 능력 갖춰야
(2)민간 주도 경제론 기초한 공산권 경협 구상
2018-07-29 06:41:22 2018-08-10 15:04:22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77년부터 10년간 재계를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지냈던 기간은 한국 경제가 성장 전략을 재구축하던 시기였다.
 
유신 정부가 주도한 중화학공업화 전략이 1979년부터 위기 징후를 보였고, 1980년에는 경제개발계획 시작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는 등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부문 중심의 무분별한 투자 확대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강제적 산업 재편 정책을 펼쳤고, 투자 조정·산업 합리화·부실기업 정리 등 산업 재배치가 1988년까지 이어졌다.
 
정부의 산업 개입 방식 역시 1980년대 들어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전두환 정부는 여전히 강력한 ‘발전국가’였지만 집중적인 금융·세제 지원으로 급성장한 재계와 정부 사이의 역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는 모습을 드러냈다. 즉, 한국 경제는 안정화 및 자유화가 강조되면서 1990년대의 민간 주도 경제로 이행하는 중이었다. 이 무렵 전경련 회장인 아산도 1980년대 들어 기업의 자유를 제기하기 시작한 당시 재계를 대변해 민간 주도 경제론-기업 자유론을 적극 주창했다.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를 주제하고 있는 아산. 아산은 제13대~17대(1977년4월~1987년2월)까지 10년 동안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사진/아산정주영닷컴
 
다른 한편으로는, 1970년대 중동 지역 건설 붐을 탄 건설업과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 따른 조선을 주력 업종으로 삼았던 현대그룹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건설업과 조선업이 세계적 불황으로 성장 동력을 잃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설업의 경우 중동 건설 경기가 퇴조하면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진 반면, 해당 국가의 자국화 시책으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건설 수주액은 1982년(133억 달러) 이후 계속 하락 추세를 드러냈다. 조선업 역시 제2차 오일 쇼크 이후 세계적인 경제성장률 저하로 1980~1983년간에 해상 물동량이 격감해 1983년 이후 선가가 폭락하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아산은 이러한 국면에서 한국 경제가 저임금에 의존한 성장전략만 고수할 수 없다면서 현대그룹의 주력 업종 전환을 모색했다. 1984년 11월, 향후 주력 분야로 전자와 자동차 부문을 설정하고 현대건설 주식 공개로 모은 400억 원을 집중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자 산업은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한 정부가 정보통신산업 육성 의지를 드러낸 분야로서, 가전제품 위주가 아니라 정보사회를 대비한 반도체·컴퓨터 등이 유망한 품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산이 또 다른 돌파구를 구상했다는 점이다. “내외 환경이 안 맞으면 만드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새로운 성장 전략에 필요한 우호적 경영 환경을 창출하기 위해 공산권과의 실리적 경제협력(경협)을 구상한 것이다. ‘중공’과 베트남은 이미 1970년대 후반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 아산은 향후 한국 경제에 중국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동아시아의 탈냉전이라는 정세 변화를 배경으로 생산 기반 재편을 모색했다.
 
아산은 새로운 시장과 자원, 저임금 노동력에 기초한 중국의 등장이라는 국제 환경 변화를 맞아 한국이 공산권과의 경협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품질과 생산성에서 경쟁력을 갖추면 저임금에 기초한 중국과 경쟁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거대한 땅과 자원을 가진 중국조차 죽의 장막을 여는 상황에서 인구는 많은데 자원은 없고 국토마저 좁은 한국은 아세안, EEC(유럽연합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유럽연합(EU)의 전신)와 함께 공존공영 원칙 하에서 공산권과 “실리 경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볼 때 중국 등 공산권과의 경협은 자원 확보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정주영에게 1970년대 ‘오일 쇼크’의 충격은 특히 생생했다. 10·26 직전에도 1980년대 한국 경제에 몰아칠 “격동의 회오리바람”으로 에너지 문제를 꼽고 제1차 석유 쇼크 이후 다른 나라들은 경쟁적으로 해외 에너지자원을 확보했다면서 한국 경제의 문제를 인식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아세안 5개국 순방(1981년 6월25일~7월9일)에 즈음하여 2억5000만명 인구와 목재, 고무, 석유, 광석 등 원자재 보유국인 아세안 국가에 합작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저임금에 의존한 성장 전략에서 벗어나야 하는 한국 경제에 조응하는 대외 진출 방식이기도 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3저호황’ 이후 한국의 기업들은 미국 일변도의 수출 시장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