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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암기와 이해라는 미신
2018-08-03 06:00:00 2018-08-03 06:00:00
오래된 미신이 하나 있다. 암기 과목과 이해 과목이라는 분리다. 흔히 국어, 영어, 수학, 물리는 이해 과목이고 지리, 역사, 윤리, 생물 같은 것은 암기 과목이라고 나눈다. 그러면서 암기 과목보다는 이해 과목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정말로 영어와 수학이 이해만 하면 되는 과목인가? 'I am a boy'라는 문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도대체 뭐가 있을까. I는 '나', boy는 '소년'이라는 뜻은 그냥 외우는 거다. 이해할 게 하나도 없다. 또 1인칭 be동사 현재형은 am이며 이 문장에는 부정관사 a가 필요하다는 문법적인 사항도 이해할 게 없다. 그냥 외워야 하는 거다. 수학의 기본인 구구단도 마찬가지다. 그냥 외워야 한다. 외우는 게 가장 좋다.
 
정작 우리가 암기 과목이라고 여기는 데에 이해해야 할 게 더 많다. 역사는 흐름을 이해해야 하고 지리는 자연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가 없으면 암기도 어렵다. 과학 가운데 유난히 암기 과목으로 폄훼(!)되는 생물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외워서 되는 게 아니다. 생명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암기 과목과 이해 과목의 분리는 분명히 미신이다.
 
독일에서 화학을 공부할 때의 일이다. 독일 대학의 화학과에는 필기시험이 거의 없다. 대부분 구두시험을 본다. 교수가 범위 안에 있는 것을 물어보면 거기에 대해 술술 답을 말해야 한다. 기껏해야 30분 정도 진행되는 시험 시간 동안에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채기는 어렵다. 내가 얼마나 암기하고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독일어도 잘 안 되는 외국인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어느 날 교수에게 푸념했다.
 
"선생님, 제가 굳이 이 독일까지 유학을 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암기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이해 중심의 선진 교육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국보다 암기를 훨씬 더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이다.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누가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는가? 학습은 암기일세. 자네 머릿속에 있어야지 책 속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책이 아니라 자네 머리에서 나와야 하네. 그러니 열심히 암기하게나."
 
외워야 한다. 요즘 논에는 목이 기다랗고 커다란 하얀 새가 눈에 많이 띈다. 백로, 왜가리, 황새, 두루미 가운데 뭘까? 약간의 암기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있다. 일단 요즘 눈에 띈다면 두루미와 황새는 아니다. 이들은 겨울 철새다. 나무에 앉는다면 두루미가 아니라 황새다. 두루미는 나무에 앉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보인다면 백로 아니면 왜가리다. 그런데 백로는 흰색이고 왜가리는 회색빛이 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이해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냥 암기하면 된다.
 
대학에서 철학을 강연한 도서평론가 표정훈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사는 무지막지한 암기과목이 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총기에 비유해서 좀 그렇지만, 실탄을 한가득 확보한 다음에야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쏠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강의해보면 요즘 학생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에 대한 실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일단 외울 건 외워야 한다." 무려 5년 전 말씀이다.
 
아는 만큼 생각한다. 머리에 들어 있는 게 있어야 생각도 할 수 있다. 창의라는 로켓은 암기라는 스프링의 힘으로 발사된다. 암기를 잘하면서도 창의성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암기를 못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없다. 단어를 모르면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법이고, 구구단을 모른 채로 미분과 적분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미신이 떠오른다. "한국 사람들은 문법에는 강한데 회화는 약해."라는 말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독일대학의 어학과정에 있으면서 실제로 한국 학생들이 서양 학생들보다 문법을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어학과정 교사의 성적처리를 도와주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서양 학생들이 한국 학생을 비롯한 아시아 학생들보다 문법 성적이 월등히 좋은 것이다. 우리가 회화를 워낙 못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문법을 잘하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하긴 문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말을 잘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국말을 잘 하는 이유는 단어를 많이 알고 알게 모르게 문법 훈련을 충실히 받았기 때문이다.
 
학습은 암기다. 모든 것은 암기에서 시작한다. 창의성도 암기에서 나온다. 외우자. 그런데 더워서 아무 것도 머리에 넣지 못하겠다. 암기를 위해 일단 에어컨을 켜야 한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에어컨을 켜자. 에어컨 만세.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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