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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포스코)항구·군사도시서 산업·기업도시로 변모
(2)포항시 세수입의 20% 차지하기도…도시발전 결정적 기여
2018-10-14 14:38:18 2018-10-14 15:39:29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지명으로서의 포항은 조선조 말기에 지방 행정 구역이 개편될 무렵 등장한 영일군 북면 포항동이 효시다. 조선 시대의 포항은 작은 포구로서 원산항과 동래항을 오가는 선박들의 중간 기항지 역할을 했다. 포항이 어항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제시대였으며, 1917년에 포항동, 학산동, 두호동이 합쳐져 포항면이 되었다. 포항면은 1931년에 포항읍으로 승격되었고 포항시가 된 것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9월의 일이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들어선 1968년까지도 포항은 6만~7만명 인구에 불과한 소규모 수산업 도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포항의 대표적 이미지는 동해 남부선 철도의 종착역, 울릉도행 선박의 출발지, 해병대 주둔 도시 등이었다. 당시 주택 보급률은 60% 미만이었고, 초등학교 학생 수용 능력도 50% 미만으로 2부제 수업이 실시되고 있었다. 자연 환경은 우수하나 도시의 위생 상태는 열악한 편이었다.
 
포항은 1960년대 초 경제개발계획 과정에서 구상된 일관제철소 입지 장소 18곳 가운데 하나였다. 종합제철소가 들어설 만한 곳으로 동해안에서는 삼척, 묵호, 울산, 포항이, 남해안에서는 부산, 마산 삼천포, 여수, 목포가, 서해안에서는 군산, 장항, 인천 등이 거론되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한때 삼천포가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1967년 6월 정부는 포항의 영일만 안쪽을 포스코 부지로 최종 선정했다. 포스코의 입지 결정은 ‘비정치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말하자면 부지 조성, 공업용수, 항만, 전력 등 4개 부분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결과였다. 다만 안보상의 여건도 포항을 낙점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2010년 포항제철소가 해도근린공원에 준공한 포항시 60주년 기념탑 경관조명. 좌측은 정면 모습이며, 우측은 뒷면 야간전경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hang Iron and Steel Company, Ltd., POSCO)는 1967년 4월1일 창립됐고 그해 10월3일 포항시 공설 운동장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회사 이름으로 고려종합제철, 한국종합제철, 포항종합제철 등이 논의되었는데, 최종 결정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명을 포항종합제철로 내렸다. “이름을 거창하게 짓는다고 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국내 대기업 가운데 특정 지명이나 도시 이름을 딴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작명 자체가 일종의 파격적인 측면이 있었다. 덕분에 포스코는 특정 도시의 이름을 내건 지방 소재 기업이지만 누구도 포스코를 지방기업이라고 쉽게 폄하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에서 대학이든 언론이든 일단 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면 모두 지방 대학, 지방 언론으로 불리는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생각해 보면 포항제철이라는 회사 이름만으로 지방발 제철보국의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훗날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 작명은 포스코 창립자 청암 박태준 명예회장이 직접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 또한 지역이나 지방이 국가 발전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상징성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청암은 포항과의 모종의 운명적 인연을 갖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그는 제7사단 중대장으로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최후의 교두보인 포항, 안강, 기계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다. 전투에서 “회생할 것인가 패망할 것인가, 그의 인생이 달렸다”고 했는데 훗날 포항제철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입지적인 무용담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는 만약 포항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죽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1968년은 포항시 역사에 있어서 일대 분수령이었다. 그 이전의 포항이 항구도시, 군사도시였다면 그 이후의 포항은 산업도시 혹은 기업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포항제철소가 들어서면서 포항은 세계적 규모의 제철 도시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포항시의 급속한 발전은 무엇보다 포항제철 입지 이후 인구의 급증에서 잘 드러난다. 포항시 인구는 1970년 이후 급속히 증가하였다. 포항시 인구 증가율은 전국 인구 증가율의 3배 혹인 7배 정도에 이를 때도 있었다. 2018년 1월31일 기준 2018년 1월31일 기준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전국 도시별 인구순위를 보면, 포항시 인구는 51만3149명으로 경상북도에서 1위다. 물론 포항은 인구의 급팽창이 모두 포스코 입지에 의한 것은 아니다. 1995년 도농 복합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포항시가 영일군과 통합하게 된 것도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포항시 인구 증가에 관련하여 포스코 입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포항시 역사상 장기 종합 개발 계획이 최초로 마련된 것도 포스코 입지가 계기였다. 포항시가 서울대학교 도시 및지역계획연구소에 의뢰한 용역 보고에 의하면 포항의 장래 인구는 1981년 24만명을 거쳐 1991년에 38만명으로 추계되었는데 다소 과다 추정된 측면이 있지만 예측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포스코 입지 이후 포항은 단순히 인구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경제 또한 크게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가령 주택 보급률은 2015년 말 기준 107.8%로 적정 주택보급률인 105~110%의 범위에 있다. 이는 포스코가 설립될 당시보다 2배가 늘어난 수치다. 포항의 경제적 원동력은 포스코다. 기업도시가 그러하듯이 기업은 지역경제 발전에 다방면으로 기여한다. 도시 기반 시설과 공공 서비스, 사회 간접 자본 및 지방 재정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포스코가 포항시에 내는 지방세는 2009년 918억에 달해 시 전체 세입의 20%를 넘어선 적이 있었다. 이를 통해 포항시의 재정 자립도는 50%에 육박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찍은 후 이후 줄 곧 감소해 2016년 242억 원을 기록했다. 포항 인구의 절반 가량이 포스코 경제 활동에 직접 관련되어 있고 나머지 인구도 어떤 형태로든 포항제철 및 그 연관 공단과 연관을 맺고 생활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는 1989년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흔히 포항은 ‘불경기를 모르는 도시’ 혹은 ‘IMF를 모르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포항 경제의 배경 혹은 배후가 포스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포스코라는 특정 대기업이 지배한다는 점에서 포항은 전형적인 기업도시다. 진보적 관점에서 보자면 포스코 독점 자본의 지역 지배가 철저히 관철되는 도시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 어떤 경우든 영일만의 기적이 포항시의 면모를 일신한 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컨대 포항은 포스코와 등치되어도 무방한 도시다. 2001년 11월에 실시된 시민 대상 설문 조사에서도 포항의 도시 이미지로서 71.3%를 차지한 공업도시가 단연 수위였다. 그 뒤를 이은 것은 항구 도시(22.3%), 관광 도시(2.6%), 군사 도시(1.8%)였다. 포항 지역의 경제적 여건에 대해서도 시민들의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 2001년 포항의 소득 수준과 주택 사정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좋다’라는 응답이 각각 75.1%, 66.8%를 차지했다.
(자료: 박태준과 지방, 기업, 도시 - 포철과 포항의 병존과 융합,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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