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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판문점, 그 싸늘했던 기억
2018-10-27 12:00:00 2018-10-27 12:00:00
최한영 정경부 기자
지난 2015년 10월, 기회가 닿아 판문점을 방문했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중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무거웠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군사분계선(MDL) 너머 판문각 앞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북한 병사의 모습이었다. 안내를 맡은 우리 측 병사는 “‘항상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로 최소 1명 이상의 병사를 세워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북 경계선을 가로질러 자리한 파란색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에 들어섰을 때는 한 병사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북측으로 통하는 출입구 앞을 막고 서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관람은 안전 문제로 차 안에서 해야 했다. 인근 도라산역 전광판에 보이던 “한국 철도가 시베리아철도·중국철도와 연계되는 날, 도라산역은 대륙을 위한 출발점으로 의미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는 글귀는 공허하게 느껴졌다.
 
판문점은 수십 년 간 분단의 상징이면서 양측이 긴장·반목하는 현장이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의 책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 70년의 대화’에는 관련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 목조건물 양쪽 입구로 휴전협정에 서명할 대표들이 입장했다. 동쪽 책상에는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 서쪽 책상에는 공산군 측 대표 남일 대장이 앉았다. 서로 웃지도 않고 악수도 하지 않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판문점의 분주하던 발걸음이 잦아들자 다시 팽팽한 긴장이 몰려왔다. 1976년 8월18일 미국에서는 ‘나무 자르기 사건’으로,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8·18 도끼만행사건’으로 부르는 아찔한 충돌이 판문점에서 발생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축적된 긴장감은 최근까지 이르렀다.
 
그랬던 판문점에서 지난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 개선과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판문점 선언’에 서명했고 한 달 후 판문점에서 다시 만났다. 지난 달 19일 평양에서 체결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방안이 담겼다. 25일 초소·화기 철수가 완료됐고 다음 달이면 남북지역 자유왕래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이번 조치로 JSA가 평화와 화합의 장소로 변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김 원장 말대로 판문점은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다리’로 변모하는 중이다(판문점의 원래 이름인 ‘널문리’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강을 건너려 하자 마을 주민들이 대문을 뜯어 다리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다만 그 다리는 아직 완전치 않다.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높아지나 통일에 이르기까지 분단은 엄연한 현실이다. JSA 비무장화 조치만 놓고도 일부에서는 우발충돌 가능성이나 경계작전에 공백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완전한 평화에 이르기까지 남북은 길고 지루한 협상을 이어가야 한다.
 
그 험난한 과정이 모두 끝났을 때, 판문점은 지난 날의 역사를 되새기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유물로 남을 것이다. 동서독을 가르는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그랬던 것처럼. 
 
최한영 정경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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