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1980~1990년대 이후 포스코와 포항 사이에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7년 6·29선언으로부터 촉발된 민주화와 1995년에 시작된 지방 자치제의 실시와 더불어 세계화의 심화가 외부 환경 변화의 주요 요인들이었다. 민주화는 사회적으로 노동 운동과 주민 참여의 열기를 높였고, 지방화는 당연히 중앙 권력의 약화 및 지방 권력의 능동적인 역할 강화를 주문했다. 세계화에 따라 점차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를 대신하여 스스로 지역의 성장에 매진하는 일종의 기업가 역할을 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같은 도시에 존재하고 있는 기업으로서나 지방자지단체로서나 서로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해졌는데 포항 역시 결코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2014년 8월2일 오후 경북 포항시 영일대 해수욕장 일원에서 ‘제11회 포항국제불빛축제’의 메인행사인 국제불꽃경연대회가 열렸다. 사진/뉴시스
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당장 포스코에 대한 포항시와 포항 시민의 부란이 표출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지역 잡지 <포항연구> 좌담회에서 당시 양종석 포항 시장은 그동안 포스코가 포항 시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고 시민들에 대해 다소 오만한 태도를 보여 왔다고 평가했다. 서창식 포항 신문사 사장은 “대기 오염과 영일만 오염의 주범인 포스코 때문에 송도 해수욕장을 잃었으며 13대 및 14대 총선 결과를 보면 포항제철소 쪽과 시내 쪽 사이에 분열과 대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동철 포항지역사회연구소장은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우수 인력을 확보하려는 포스코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포스코 사원 단지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나 특수 학군을 고집하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대환 <포항연구> 편집인은 “포스코는 어디까지나 포항의 상징적 부분인데, 그 상징성이 마치 포항의 전부인 듯한 인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외부 조건의 변화는 그 자체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포스코의 내부 사정과도 일정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정계 진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9년 유신 체제의 붕괴 이후 등장한 전두환 정권하에서 청암은 1981년 국회에 진출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인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에 민정당 비례대표로 다시 진출했다가 1990년에는 민정당 대표로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같은 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사이에 이른바 ‘3당 합당’이 이루어지자 그는 민자당 최고위원직을 맡게 되었다. 청암의 정계 진출 목적은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박정희 대통령 사후 포스코의 외풍을 막는 울타리가 되려고 한 것으로 알려진다. 외풍으로부터 포스코 보호라는 측면에서 청암의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는 것도 흥미롭다. 우선 청암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1987년 12월에 한겨레신문 창간 자금으로 5억원을 지원했다. 이는 창간준비위원회가 2만7000여명으로부터 모금한 창간기읍 50억원의 1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청암은 김대중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택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과거의 정치적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에서 한국 보수층에게 “일정한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곧,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이 필요한데 “나 자신부터 용기를 내야겠지요”라고 했다고 한다.
포스코의 내부 사정 변화는 또 있었다. 민주화 열기와 함께 1988년 6월 포스코에는 노동조합이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청암은 노조 설립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노조 탄생 이전 포스코는 노사협의회와 고층 처리위원회에서 노사 관계를 다루어왔다. “노조 없이도 고용인의 이익이 높은 수준에서 지속될 수 있다면, 그리고 기간산업으로서의 우리 회사의 위치를 고려할 때, 노조 없는 회사를 꼭 만들어 운영해 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노조 설립 소식을 접한 청암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쟁취하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구하자는 목표는 아니지 않겠느냐? 나는 우리 회사의 복지제도와 근로 조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거나 빠뜨린 것이 있으면 여러분이 얘기해달라. 합당하고도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나는 다 들어줄 생각이다”라고 대응했다. 결국 포스코 노조는 1992년 8월 이후 집행부가 총사퇴함으로써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1990년 실시한 노조 활동에 대한 포스코 노조 조합원들의 인식조사에서도 정치적 내지 이념적 노조 활동보다 경제적 활동을 우선한다는 대답이 더 많아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기피 성향이 드러났다.
(자료: 박태준과 지방, 기업, 도시 - 포철과 포항의 병존과 융합,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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