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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재개발 논란 청계천 공구상가 가보니…
이탈리아·일본 소규모 기술 장인 보호…한국, 아파트형 공장 이전 실험 '실패'
2019-01-22 20:00:00 2019-01-23 08:59:12
[뉴스토마토 김응열 기자] "여기 없어지면 많은 게 불편해져요."
 
지난 18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세운3구역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만난 A(40)씨는 청계천 공구상가 재개발 소식에 한숨을 내쉬었다. 금속공예업에 종사해 제품을 사기 위해 자주 이곳을 들른다는 그는 "여기는 '공구백화점'이다. 시설이 낙후됐다고 재개발해서는 안된다"며 재개발 사업에 반대한다고 했다.
 
청계천 공구상가, 재개발 논란으로 '몸살'…"산업생태계 무너질라"
 
이날 기자가 찾은 청계천 공구상가는 한적했다. 골목을 오가는 건 파란 트럭과 오토바이,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뿐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에는 '세입자 대책 없는 재개발 결사반대!!'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다. '기이잉~'하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종종 빈 골목을 메웠고 가게 내부 곳곳에는 '재개발 반대'라고 적힌 빨간 조끼가 걸려 있었다.
 
 
22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 공구상가의 한 상점에 '재개발반대'라고 적힌 빨간 조끼가 걸려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청계천 공구상가는 재개발 논란으로 한창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일대는 지난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된 후 별 진전이 없다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철거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여론의 도마에 오른 냉면집 '을지면옥'도 이곳에 있다. 을지면옥 사태 후 재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거세졌고, 지난 16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지역의 재개발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히면서 갈등은 진정되는 듯 했다. 상인들은 여전히 일터를 사수하기 위해 빨간 조끼를 입고 있다. 이날 만난 주물업 종사자인 이병열(남, 53)씨는 "여기가 철거되면 이곳의 산업생태계가 무너진다"며 재개발을 반대했다. 그는 "이곳은 상점들이 가까워서 작업이 편리하고 시간도 단축된다는 게 큰 이점"이라며 청계천 공구상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청계천 공구상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재료 구매부터 가공, 2차 가공과 후처리까지 이곳 안에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소비자가 제작 물품을 한 업체에 주문하면, 상가 내의 다른 가게에서 원재료를 구입해 가공한다. 이후 2차 가공과 광을 내는 작업 등의 후처리도 비슷한 과정으로 진행한다. 이 씨는 "상가 내에서 다 해결할 수 있어, 학생 졸업작품 등 간단한 작업은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 10명 미만 장인기업 GDP의 12%…제조강국 일본도 제조 기술자 육성 뒷받침 
 
이와 유사한 산업단지는 해외에도 있다. 이탈리아는 제조 장인 기업이 밀집한 클러스터가 발달했다. 코트라의 <이탈리아 장인기업 비결과 우리기업과의 협력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전국에 산업별 장인기업 클러스터가 약 72개 분포해 장인기업 경제활동의 중심 근거지 역할을 하고 있다. 클러스터 내 장인들 간에는 수평적 네트워크가 형성돼 유기적으로 분업·협업하고 정보 등을 교환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장인기업은 전체 기업의 약 35%인 140만개 정도가 있고, 그 중 95%가 직원수 10명 미만의 영세 기업이다. 크기는 작지만 이들이 이탈리아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다.
 
이탈리아는 장인기업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직계가족이 가업을 승계할 경우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상속 세제 등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장인기업에 대한 대출 요건을 완화하기도 했다.
 
22일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한 작업자가 금속재료를 자르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일본도 유사한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1999년 모노즈쿠리 기반기술진흥기본법을 제정했고 현재도 이 법을 근거로 관련 정책을 펴고 있다. 모노즈쿠리는 최상의 물건을 만드는 일본의 제조문화를 일컫는다. 장인기업의 후계자가 친족이 아니어도 상속 증여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하고 기술자 연수와 근로자 확보 등에 힘쓰는 등 제조 장인을 국가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2003년에는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공구상인 일부가 송파구 장지동에 마련한 아파트형 공장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 중 대다수가 얼마 못가 짐을 쌌다. 이씨는 "아파트형 공장에서는 청계천처럼 협력시스템이 자리잡지 못해 이주한 상인들 대부분이 뛰쳐 나왔다"며 "일본 등 외국은 기술자를 대우해주는데 한국은 '껌값'으로 안다"고 꼬집었다.
 
갈 곳 없어진 소비자들…금속디자인 미래도 사라진다
 
공구상가 해체는 소비자의 불편함으로 직결된다. 상가 내 금속가공업체 대덕메탈을 방문한 A씨는 "청계천 을지로 종로 일대는 각종 부자재와 부품이 모두 있다"며 "이곳이 없어지면 개별적으로 하나씩 구매해야 해 비용과 시간, 품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또 "우리 같은 금속 공예 종사자에겐 꼭 필요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상가를 방문한 동시통역 렌탈업체 종사자 권태오(남, 30대)씨도 청계천 공구상가가 사라지면 많은 점이 불편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터넷 등으로 구매하는 건 한계가 있다"며 "여기서는 흥정도 쉬워 단가에 맞춰 제작을 주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가 내 어느 곳에 어느 업체가 있는지 꿰고 있을 정도로 애용하고 있다고 한다.
 
22일 오전 청계천 공구상가 거리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청계천 공구상가는 소량 제작이 필요한 학생들에게도 유용한 곳이다. 대덕메탈을 운영하는 이정염(남, 53)씨는 "이곳은 다른 곳에선 불가능한 소량제작을 해준다"면서 "졸업작품이나 과제물을 준비하는 전국의 금속디자인과 학생들이 모두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중순 청게천 공구상가를 이용한 한양대학교 대학원생 최정식(남, 31)씨는 "이곳에선 원하는 대로 맞춤제작을 할 수 있어 자주 이용한다"면서 "졸업 때까지 꾸준히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가 졸업 후 청계천을 찾았을 무렵, 공구상가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지 현재로선 알길이 없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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