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지난 2015년부터 이어진 현대중공업 그룹과 세계 1위 석유업체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기업 아람코와의 전략적 협업이 현대오일뱅크 지분 참여로 확대됐다. 정기선 현대중공업그룹 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부사장,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가 주도한 소위 ‘정기선 프로젝트’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아람코와 최대 1조8000억원 상장 전 지분투자(Pre-IPO)에 관한 투자계약서를 체결했다고 28일 밝혔다. 이번 계약은 현대중공업지주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오일뱅크 지분 19.9%를 아람코에 매각하는 것으로, 아람코는 현대오일뱅크의 시가총액을 10조원으로 산정해 주당 가치를 3만6000원 수준에 인수할 계획이다. 이번 계약은 양사 이사회 의결을 통해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매각이 이뤄지면 아람코는 현대오일뱅크의 2대 주주가 되며, 현대중공업지주의 지분율은 71%로 낮아진다.
충남 서산시에 소재한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사진/현대오일뱅크
이번 계약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두 번째 추진한 현대오일뱅크 상장(IPO)이 좌초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2010년 현대오일뱅크를 되찾은 현대중공업그룹은 2011년 정유업 호황을 바탕으로 상장을 추진했으나 이듬해 상반기 국제유가가 급락하고 업황이 급격히 기울면서 실패했다. 2015년 찾아온 조선업 불황에 의해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과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추진하면서 2017년 다시 IPO를 추진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이를 통해 2조원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며, 이 돈으로 구조조정과 지배구조 재편을 마무리 짓고 남은 돈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에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로 금융당국의 회계감리가 강화되면서 예정대로 추진할 수 없게 돼 IPO 추진이 또 다시 중단될 상황까지 몰렸다.
이 때 우군으로 등장한 것이 아람코였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해 11월 아람코에 투자 제안을 했고 두 달여 만인 이번에 현대오일뱅크의 IPO를 전제로 프리 IPO 방식으로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아람코가 평가한 현대오일뱅크의 가치 10조원은 2년전 시장에서 산출한 가치와도 일치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받게될 매각대금 1조8000억원도 기대 이상의 수준이다.
현대중공업그룹 관계자는 “2015년 11월 아람코와 전략적 협력 양해각서(MOU) 체결 이후 여러 사업을 함께 진행하며 신뢰 관계를 쌓아온 것 등이 이번 투자에 영향을 끼친게 사실”이라면서 “이번 계약으로 양사는 더욱 깊은 우정을 나누는 ‘절친’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프리IPO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다소 시일이 필요한 만큼 현대오일뱅크 상장은 불가피하게 연기될 것”이라며 “이번 계약을 통해 조달한 금액은 신사업투자와 재무구조 개선 등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대오일뱅크 측은 아람코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석유화학과 유전개발, 윤활유 사업 등 다양한 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람코의 현대오일뱅크 지분 인수는 현대중공업과의 협력 확대와 더불어 미국과 이란 등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도입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에서 사우디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도 풀이된다. 금융감독원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17년말 현재 국내 정유업계 시장 점유율(내수경질유)은 SK에너지가 32.0%, GS칼텍스 25.0%, 현대오일뱅크, 21.5%, 에쓰오일 20.0%의 순이다.
지난 1991년 쌍용정유(현 에쓰오일)를 인수해 한국에 진출한 아람코는 2014년 한진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에쓰오일 지분 28.4%를 추가 사들였다. 이번 지분 참여로 아람코는 한국으로의 원유 공급량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양사의 시장 점유율을 합치면 41.5%로 1위 SK에너지보다 높다. 한국 정유업체들이 미국과 이란 등으로부터 원유 도입 확대 움직임이 일면서 사우디산 원유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낮아지고 있다. 정유업계는 아람코의 지분 투자로 한국내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아람코가 19.9% 지분만 인수한 것은 현재 에쓰오일의 지분 63%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20% 이상 인수하면 현대오일뱅크를 에쓰오일의 계열사로 편입해야 하는 등 소유권의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현대중공업그룹과 아람코는 사우디 산업발전 계획인 ‘비전 2030’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는 사우디 최대 조선소 건립을 추진중이다. 2021년 상반기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 상반기 내에 엔진 합작법인을 설립한다. 특히 양사는 조선소 준공식 당일 이 곳에서 처음으로 건조한 선박 명명식도 동시에 개최할 예정으로, 올 상반기에 발주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발주 선박은 현대중공업이 사실상 수주할 것으로 알려졌다.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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