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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삼성가 구심점' 이인희 고문 별세, 조문행렬
이병철 선대회장 맏딸로 한솔그룹 일궈…두둑한 배포·섬세함 겸비한 경영인
2019-01-30 20:07:20 2019-01-30 20:07:20
[뉴스토마토 김진양 기자] 30일 타계한 청조(淸照)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범 삼성가 일가를 비롯한 재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녀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누나인 이 고문은 이날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이날 정오경 빈소가 마련된 장례식장 입구 안쪽에는 ‘청조 이인희, 늘 푸른 꽃이 되다’라는 추모 현수막이 달렸다.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 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장례식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고 있다. 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30일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사진/뉴시스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고인의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날 오후 12시30분께 빈소를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2시20분경에는 황각규 롯데 부회장이 조문했다. 황 부회장은 “신동빈 롯데 회장이 고인의 아들인 조동만 한솔 전 부회장과 친분있는 것으로 안다”며 “신 회장 대신 왔다"고 말했다. 이어 2시26분에는 오성엽 롯데지주 커뮤니케이션실 사장이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삼성가 장손인 이재현 CJ 회장은 2시20분께 빈소에 도착해 50분 가량 머무르다가 떠났고, 박근희 CJ 부회장, 김홍기 CJ 대표이사, 최은석 CJ 총괄부사장, 신현재 CJ제일제당 대표이사, 강신호 CJ제일제당 식품사업부문 대표이사, 박근태 CJ대한통운 대표이사 등 CJ그룹 경영진도 비슷한 시각 함께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3시15분에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인프라코어 회장), 3시20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묵묵부답으로 빈소에 들어갔다.

3시30분께 빈소를 찾은 이재환 CJ파워캐스트 대표는 “고모님께서 주무시다 새벽 1시에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평소 따뜻했던 분, 저를 자식같이 대해주셨다”고 회상했다. 구자열 LS그룹 회장도 빈소를 들렀다.
 
 
방송인 이상용씨는 4시59분께 조문을 마친 뒤 고인과의 관계를 묻는 기자들에게 “제 아내가 이병철 회장 비서였다”며 “고인은 생전에 제가 TV 나오기 시작할 때 잘 챙겨줬다”고 회고했다.

이 고문은 1929년 1월30일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4남6녀가운데 맏딸로 태어나 정확히 만으로 90살 생일인 이날 평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다. 그의 삶은 범 삼성가의 정신적 지주, 생의 마지막까지 가족들 간 인연을 이어준 구심점 역할로 대변할 수 있다.

대구여중과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가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 조운해 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과 혼인한 뒤 학교를 중퇴하고, 조동혁(한솔케미칼 회장)·동만(전 한솔그룹 부회장)·동길(한솔그룹 회장)·옥형·자형 등 3남2녀를 낳아 가사에 전념했다.

경영인으로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79년 호암이 한국에서도 내세울 수 있는 호텔을 만들겠다며 정부로부터 인수한 호텔신라 상임고문에 선임되면서부터다. 서울 신라호텔 전관 개보수 작업 및 제주신라호텔 건립 등을 훌륭히 마무리해 수완을 인정받았다. 그때의 경험으로 이 고문은 호텔·리조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솔그룹을 이끌며 오크밸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 고문은 200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을 살면서 창작의 기쁨을 느낀 적이 정확히 세 번 있다. 선친께서 세웠던 서울 신라호텔을 맡았을 때, 나의 생각을 녹여 제주신라호텔을 만들었을 때, 그리고 오크밸리를 만들고 키워 나가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텔·리조트 사업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1983년에는 한솔그룹의 모태가 된 전주제지 고문에 취임했다. 전주제지는 호암이 제지사업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것과 더불어 제조업 기반이 취약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라도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한 기업이었다. 이 고문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제지회사로 도약시켰다.

이 고문은 어릴 적부터 남자 못지않은 배포와 섬세함까지 갖춰 부친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많이 들었다. 이 때문에 호암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암은 골프 라운딩을 할 때 마다 이 고문을 데리고 다니며 인맥을 넓혀주고 경영에 관한 조언도 해 줬다. 삼성그룹 승계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호암이 이 고문을 두고 “쟤가 아들이라면 내가 지금 무슨 근심 걱정이겠나”라고 수시로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 조 전 이사장도 회고록에서 부인이 “수완이 탁월하고 사업가적 재질이 뛰어난 전형적인 삼성가 출신”이라고 평가했다.

이 고문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주제지를 갖고 1991년 삼성그룹에서 가장 먼저 분리·독립했다. 이어 같은 해 막내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를, 1993년에는 장손 이재현 회장이 제일제당(현 CJ)이 삼성에서 나와 홀로서기에 들어갔다. 이 회장은 독립 후 전주제지 사명을 한솔제지로 바꿨다. 이 고문은 제지 중심의 사업 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새로운 분야에 진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개인휴대통신(PCS)였다. KT에 매각했지만 한솔은 국내 통신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상향 곡선을 이어가던 한솔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라는 복병을 만나며 흔들렸다. 하지만 이 고문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 오너가의 맏딸로서 행복한 삶이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부친과 동생, 동생들끼리의 갈등과 반목,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자식 때문이었다. 이럴 때마다 이 고문은 앞으로 나서 중재를 했다. 그가 있었기에 가족간의 우정이 완전히 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고 재계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한편 이 고문은 다음 달 1일 영결식을 거쳐 화장 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위치한 가족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 고문이 애착을 갖고 키운 한솔그룹 리조트 오크밸리 인근 지역이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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