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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우리 시대의 난장이들
2019-02-20 06:00:00 2019-02-20 06:00:00
이웅열 전 코오롱그룹 회장의 차명주식이 들통났다. 상속받은 주식을 차명으로 보유하다 적발돼 기소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 전회장은 부친인 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차명으로 남긴 코오롱생명과학 주식 38만주를 차명으로 보유하면서 신고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은 대주주로서 주식 보유 상황을 금융당국에 보고해야 하지만, 해마다 누락시켰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한 자료를 제출할 때에도 빼먹었다.  
 
이 전회장은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손자다. 말하자면 재벌3세다. 그는 다른 재벌 2세또는 3세와 달리 불미스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때문에 비교적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코오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도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하다"고 겸손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렇지만 이처럼 차명계좌가 드러나자 부담을 느끼고 물러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재벌총수들이 차명으로 주식이나 계좌를 보유하다가 적발당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다. 이건희 회장은 2008년 삼성특검 당시 1197개의 차명계좌를 적발당했다. 계좌에 담겨 있는 자금도 4조5000억원 규모를 헤아렸다. 2017년 금융감독원 전수조사로 32개 계좌가 드러났다. 또 지난해 경찰과 검찰의 수사결과 차명계좌 520개의 차명계좌가 추가로 발견됐다. 이 모든 것을 더하면 1749개에 이른다. 또 차명계좌를 사용해 주식을 매매하는 과정에 양도세 및 지방소득세 85억5700만원을 탈루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세계그룹도 지난 2015년 11월 이마트 등의 임직원 명의로 되어 있던 차명주식 37만9733주를 이명희 회장 실명주식으로 전환했다. 차명주식은 이마트에 대한 서울지방국세청의 세무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빙그레 최대주주인 김호연 회장도 2017년 7월 차명주식 29만4070주를 실명전환해야 했다. 이 역시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다. 
 
19만주의 차명주식을 보유하던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은 벌금 1억원을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았다. 이중근 부영회장은 2017년 7월 차명주식이 드러나 검찰에 고발되는 등 재벌총수의 차명재산은 끊임없이 노출됐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도 재벌총수들이 차명으로 애용해 왔다. 차명으로 주식을 취득하고 세금 등을 포탈하는 수법이다. 2013년 이재현 CJ 회장이 BW를 차명으로 매매해 지분을 늘리고 215억원을 포탈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도 1999년~2000년 해외BW에 대한 신주인수권을 차명으로 행사한 사실이 2차례 적발됐다.
 
재벌총수들은 차명계좌나 차명주식을 마치 ‘훈장’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차명재산을 통해 자신들이 일반 국민이나 투자자와 다르다는 ‘차별성’을 과시하려는 것 같다. 이런 빗나간 ‘정체성’ 의식을 흉내내는 사람들도 많다. 
 
2017년 10월 국정감사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이 제시한 차명재산 적발 현황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총 1만1776명이 9조3000여억원의 차명재산을 적발당했다. 
 
‘검은 돈’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까? 그 많은 돈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오랜 세월 얼마나 마음 조마조마했을까?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시대의 난장이’들이다. 
 
대한민국은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법치국가이다. 그 누가 거액의 재산을 실명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김영삼정부가 금융실명제를 단행한지 4반세기가 지나도록 근절되지 않고 있다. 잊혀질 만하면 하나씩 불거진다.  
 
‘우리 시대의 난장이’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차명재산 보유자들이 법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융사와 당국도 함께 영혼을 팔아먹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차명계좌와 차명주식이 그토록 오래도록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차명계좌들의 용처는 사실 그 누구도 모른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용됐다면 차라리 건전하다고 해야 할 듯하다. 사실은 지난날의 경험을 돌아볼 때 적지 않은 돈이 비자금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그 용도를 모두 밝혀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차명재산은 국가경제의 종양 같은 것이므로, 하루 빨리 제거돼야 한다. 이를 위한 특단의 조치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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