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양지윤 기자] 2019년 3월은 국내 기업사의 한 획을 그은 달로 기록될 전망이다.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 지침) 적용과 소액 주주들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대기업 총수와 주주들이 관계를 재정립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특히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이사직에서 퇴출당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제경영의 폐단과 불투명한 기업 경영 방식으로 대기업 총수가 기업 가치를 훼손하게 될 경우 주주들이 직접 나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올해 주총을 계기로 기업들을 향해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가치 제고, 윤리경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기업 역시 이런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고 책임·윤리경영을 강화하는 방향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주총은 각 기업에 '주주가 무서워졌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기회가 됐다. 주주들이 총수의 경영능력과 기업활동을 평가하는 잣대가 이전보다 확연하게 높아졌음을 조 회장의 퇴진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주총 결과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총수가 기업의 전권을 휘두르는 한국만의 독특한 경영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오너 경영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의사결정과 추진력이다. 한국 경제가 대기업 중심으로 압축성장한 비결 중 하나로 꼽힌다. 오너 경영의 한계도 분명하다. 주로 가족 단위로 경영이 이뤄지다보니 자질과 상관없이 경영권이 승계되는 일이 빈번했다. 또 독단적인 경영과 일탈행위를 견제하는 것도 사실상 어려웠다.
한진 총수 일가의 사례는 오너 경영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 시켰다. 압축성장의 시대에 용인되던 구태들이 산업구조 고도화 시기에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총수 일가의 잘못으로 기업가치가 훼손될 경우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통해 주주들의 경고 메시지가 왔을 때 받아들일 만한 부분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다수의 기업들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빌딩에서 열린 한진칼 제6기 정기 주주총회의에 참석한 주주들이 재무제표 및 연결재무제표 승인의 건과 관련해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달 주요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가 막을 내린 뒤 재계의 긴장감도 한층 커졌다. 올해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자들과 소액 주주들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주주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지 여부가 과제로 떠올랐다.
당장 내년 주총이 고민이다. 지난달 29일 한진그룹 지주사 한진칼 주총에서는 조 회장 측근인 석태수 대표의 사내이사 연임안과 국민연금이 조 회장을 겨냥해 제안한 '이사 자격 강화안' 모두 주주 표결에서 한진가 측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진짜 승부처는 내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 회장과 그의 아들인 조원태 사장 모두 내년 3월 한진칼 사내임기가 만료된다. 문제는 주주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게 비단 한진그룹에 국한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각 기업들은 주주의 경영 참여기회 확대 등 주주친화 정책을 비롯해 총수와 경영진의 책임·윤리경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다. 또 한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배구조 개선 작업에도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예상된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올해 주총에서 국민연금과 기관투자자들은 스튜어드십코드에 입각해 기업가치 제고에 초점을 맞춰 의결권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뚜렸했다"며 "오너 리스크가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이전보다 강해졌으며, 중장기적으로는 오너의 경영권과 기관·일반 투자자의 주주권이 견제와 균형을 통해 조화를 이뤄나가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양지윤 기자 galile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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