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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마을' 탄 씨가 '그날'을 이야기하는 이유
"한국군, 양민들 방공호에 몰아 넣고 수류탄 던져…진실은 진실, 과거 인정해야"
2019-04-05 02:00:00 2019-04-05 02:00:00
[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1968년. 인도차이나에 있는 아름다운 나라 베트남은 차라리 지옥도에 가까웠다. 전쟁이 장기화 국면으로 넘어가던 그 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음력 설날을 이용한 구정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는 명목 아래 우방 미국을 돕기 위해 파병된 한국군은 베트공은 물론이고 베트남 국민들에게도 악명이 높았다. 한국에서는 군의 용맹함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그만큼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다는 것이 당시에 살아 남은 베트남 국민의 기억이다. <뉴스토마토>는 당시 하미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베트남 피해자를 4일 만났다, 그는 이날 청와대에 한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청원서 제출했다. 30분간 진행한 짧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탄씨의 '그날'을 재구성했다(편집자주).
 
하미마을 생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 씨. 사진/최서윤 기자
 
 
그 날을 기록하기까진 32년이 걸렸다. 1968년 어느 날 한국군이 갑자기 마을에 들어왔다집에 쳐들어온 군인들은 어머니동생 그리고 탄을 끌어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방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졌다다리와 허리에 파편이 튀었다눈앞에서 어머니와 동생친척들이 피 튀기며 쓰러지는 모습을 본 뒤 병원으로 실려 갔다깨어나 보니 한 쪽 귀도 들리지 않았다열한 살의 탄은 그렇게 세상에 혼자가 됐다.
 
치료를 받던 어느 날 어머니 또래의 40대 여성이 찾아왔다돈을 주고 위로를 건넸다함께 살자고데리러 오겠다고 했다그녀를 기다리며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곧 오겠다던 그녀는 결국 오지 않았다왔다 가는 사람들에게 지칠 때쯤 열일곱 된 사촌 오빠가 자전거를 끌고 찾아왔다오빠를 따라 갔지만 형편은 다 비슷했다다른 친척집에 맡겨졌다집안일을 하고 아기를 돌봤다학교도 다니지 못했다야단을 들을 땐 내가 너무 어려서 실수를 많이 하는 구나’ 자책하며 지냈다.
 
1975해방이 됐다고 했다용기 내 다시 고향인 하미마을을 찾아갔다그곳에서 오빠를 만났다스물 셋에 마을을 떠나 학살을 피할 수 있었던 오빠는 7년 동안 줄곧 탄을 찾아다녔다고 했다오빠와 다시 고향마을에 살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야학에 나가 공부도 시작했다. 2년제 상급학교를 졸업한 뒤 인쇄공장에 취직한 탄은 1987년 결혼을 하고 다낭에 자리 잡으며 고향 하미마을을 떠났다.
 
2000년이 돼 하미마을에서 사람들이 그날을 기록한다는 얘기를 들었다위령비를 세우고 비문에 저마다 가슴 속에 담고 있던 사연을 큰 글자 몇 줄에 담았다예순 셋이 된 탄 아주머니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다만 두 글자, ‘죄악이란 단어로 한국군의 만행을 담은 비문 내용을 표현할 뿐이다그렇지만 32년 만에 어렵게 담은 단 몇 줄짜리 그날의 기록은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관이 마을 인민위원회에 압력을 가하면서 몇 달 만에 연꽃무늬로 덮였다.
 
탄 씨는 연꽃무늬로 덮인 그날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탄 씨는 퐁니마을은 당시 미군이 들어와 조사한 기록과 참전군인들의 증언이 증거로 남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데하미마을도 증거를 더 모아 소송을 내고 사실을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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