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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카트, 프리피야트, 글라스노스트
2019-04-26 06:00:00 2019-04-26 06:00:00
"가정주부들은 스커트를 한 치씩 줄여서 입음으로써 천을 절약했고, 성냥 한 개비를 절약하기 위해 세 사람이 모여야 담뱃불을 켰다.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결속해서 경제가 부흥될 때까지 노동쟁의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50대 이상의 독자라면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성냥'이 문제를 푸는 열쇳말이다. 그렇다. 독일이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이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학년이 바뀌고 선생님이 바뀌어도 여전했다. 이유가 있다. 무려 박정희 대통령 말씀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졌지만 검소한 독일인에 대한 이야기는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1992년 독일에 유학 가서 만난 독일인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스커트와 성냥개비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 독일 사람들은 슈퍼마켓에 갈 때 항상 동전을 챙겼다. '카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다. 정작 검소한 사람은 나였다. 동전을 아끼느라 절대로 카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맥주를 박스로 사야 했을 때 처음 카트를 사용하면서 알게 되었다. 카트를 반납할 때 동전이 다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적어도 1992년까지는 한국에 카트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몇 년 후 한국에서도 '카트'를 봤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 것 같았다.
 
구소련에는 1985년에 이미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경관, 수영과 유도 펜싱을 즐길 수 있는 스포츠센터, 영화관과 도서관 그리고 공연장이 모여 있는 복합문화센터, 컨베이어벨트를 활용해 서빙하는 카페, 그리고 '카트'를 끌며 쇼핑하는 대형 슈퍼마켓이 있는 도시가 있었다. 도시의 이름은 프리피야트. 거주자의 평균 연령은 26세였다. 아이들이 넘쳐나는 젊은 도시였다. 하지만 아무나 이곳으로 이주하지는 못했다. 당시 소련에는 거주이전의 자유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피야트는 꿈의 도시였다. 1986년 4월25일까지는. 4월26일 프리피야트의 모든 학교는 일찍 파했다. 도시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발전소에 화재가 났기 때문이다. 신이 난 아이들은 불구경을 갔다. 하지만 불은 구경도 못했다. 대신 아이들은 강둑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사고 후 이틀 사이에 프리피야트 시민 4만 8000명은 1300대의 버스에 실려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꿈의 도시 프리피야트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폐허로 남아 있다.
 
4월26일 새벽 1시24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국경 사이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화재가 발생했다. 원자로 4호기가 비정상적인 핵반응을 하면서 발생한 열이 냉각수를 분해시키고 이때 발생한 수소가 원자로 안에서 폭발해 생긴 사고다. 이 폭발로 원자로 천장이 파괴되었고 그 틈새로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었다. 원자로 설계결함과 운전미숙이 결합되어 일어난 일이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소련은 사고 당일 원전 종사자 2명과 소방관 29명 등 3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2005년에야 여러 나라가 참여한 최초의 공식보고서인 '체르노빌 포럼'이 발표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직접 사망자는 56명이고 사고로 인한 암사망자는 4000~9000명이다. 하지만 정말일까? 원전 폭발 뒤 정리작업에 동원된 노동자만 20만 명이고, 약한 방사능에 노출된 노동자는 60만 명에 이르며,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500만 명에 이르는데…. 당장 2006년부터 WHO는 2005년 보고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2009년 미국뉴욕과학아카데미는 사고 후 30년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발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피해 정도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체르노빌 원자로 붕괴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로 이어졌다. 소비에트 공산당은 체르노빌 사고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당시에는 소련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정상 수준보다 6배 높은 방사능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검출된 후 스웨덴 정부의 추궁이 있은 후인 4월28일에야 소련 정부는 마지못해 사고 발생 사실을 인정했다. 소련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5월6일에 이르러서다. 
 
세계시민의 안전보다 자신의 보신을 더 중요시한 공산당 관료를 정리하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펴게 되었다. 완전한 안전이란 없다. 사고는 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 꿈의 도시 프리피야트는 카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글라스노스트가 핵심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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