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 25화)아버지의 이발소, 아들의 바버숍
“면도하고 나면 /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을 수 없음이라”
입력 : 2019-04-29 08:55:58 수정 : 2019-04-29 08:55:58
미용실에 가는 남성은 많아도 이발소에 가는 여성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성인 필자는 국내에서도 이발소에 가 머리를 자른 적이 없었는데, 십수 년 전 인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미용실을 찾지 못해 길거리에 보이는 이발소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그들은 이발소에 머리를 자르러 온 외국인 여성을 신기해하고 나는 미용실이 없고 이발소만 있다는 동네 주민들의 말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후에 들리는 말로는 인도 여성들이 우리만큼 머리를 자주 자르거나 파마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남의 나라 이발소에서 처음 해 본 커트의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인도에서는 길거리에서 이발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진은 나무 위에 거울을 걸어 놓고 이발하는 한 행상과 손님의 모습. 사진/뉴시스·AP
 
이발소, 문을 열다
 
이발소의 상징인 삼색등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영어시험 독해 구문들 중 하나로 만났을 수 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이발사가 치과, 외과 의사를 겸했기 때문에 이발소의 삼색등은 외과의 상징으로, 빨간색, 파란색, 흰색이 각각 동맥, 정맥, 붕대를 뜻한다는 내용이다. 16세기 프랑스의 한 이발사가 처음 고안해 내걸었다는 이 삼색등은 환자들이 빨리 알아볼 수 있도록 이발소 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게 되었고 세계 공통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발소는 손님의 이를 뽑고 몸에 칼을 대 수술을 하고 이발과 면도를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웃들이 모여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회합의 공간이기도 했다. 
 
종묘공원 근처에 삼색등을 내건 한 이발소가 영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필자 제공 
 
1895년 음력 11월 15일 위생과 편리를 이유로(사실은 일본 관리의 요구로) 단발령이 내려져 고종과 세자가 먼저 머리를 자르고 다음날에는 정부 관료와 군인들이 머리를 잘랐으며 또 그 다음날에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단발이 강요되면서 우리나라 이발의 역사가 시작됐다. 물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므로 감히 훼손할 수 없다는 유교적 신념에 부딪쳐 1897년 철회되었다가 1900년 다시 부활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단발령이 내려진 지 6년 후인 1901년, 인사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이발관인 동흥이발소가 문을 열면서 새로운 근대적 공간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발이 평범한 민중들에게 대중적 문화가 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단발(斷髮)이 대중화된 후에도 이발소·이발관 또는 이용원이라 불리는 곳에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 미제부락 이발소 갈 팔자 되나
머리터럭은 아들이 가위질로 깎아서 물결지고
턱수염도 며느리 손거울 갖다가 보며
가위로 베어낸다
그러고 나서 집 이발한 늙은 얼굴
거울에 담아 바라본다
벽의 거푸집 빈대 끼어 있듯이
그동안 이 세상 천촌만락 한 군데 끼여
잘도 살았다
흙에 코 박고 살았다
십릿길도 밖으로 나가는 일 큰일이어서
그냥 마을에서만
입안에서만
딴 세상 넘보지도 않고 살았다
< … >
어디 가고 싶다
어디 가고 싶다
백리는 못 가더라도
백리 새끼 십리라도 오리라도
할미산 너머라도
수수몽댕이 무겁고
거치렁이 벼이삭 무거운데
다 놓아두고
쨍그랑 깨어질 듯한 하늘 아래
어디로 가고 싶다

아무래도 병만이 할아버지 세상 뜰 생각인가 어쩐가 원
(‘병만이 할아버지’, 2권)
 
이발소의 추억과 변천사
 
한국전쟁 이후 이발이 본격화되면서 이발소가 증가하게 된다. 머리를 짧게 밀어야 했던 남자 중고생들이 특히 단골 고객이었을 것이다. 당시 목수, 양복장이, 미장이라 불리던 장인들처럼 이발 기술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직종이어서 도제식 교육으로 경험을 쌓아 이발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장원도 증가하고 미용사 역시 도제식으로 양성되었는데, 고된 노동과 저임금의 환경 속에서 미래의 꿈을 위해 보조원 생활을 몇 년씩 견디다가 정식으로 이발사, 미용사가 되곤 했다. 요즘은 학원이나 전문적인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받기도 하지만, 수십 년간 현장 경험으로 단련된 원로 장인들의 실력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발소의 추억을 떠올릴 때 공통되는 것들 중 하나는 아마도 ‘이발소그림’일 것이다. ‘이발소그림’이라는 명칭은 ‘싸구려 그림’, ‘키치’를 상징하는 용어로 암암리에 상호 이해되고 있지만, 예술문화의 향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사람들에게 밀레의 <만종>, <이삭줍기> 같은 복제화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시킨의 시는 이국의 예술문화를 접하게 해 준 계기였다. 대중이 좋아하는 호랑이, 새끼돼지들에 둘러싸인 어미돼지의 모습도 서민들의 염원을 담아 이발소그림의 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이발소그림의 특성이 키치의 미의식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민화라는 대중문화의 맥을 잇고 있다고 본 연구자도 있다(박석우, <(일상 속의 미술)이발소그림 : 민화에서 복제화까지>, 동연, 1999, 145쪽). 한편, ‘이발소 미술관’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서민들이 집 벽장에 붙어 있던 민화들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이발소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걸기 시작하는 바람에 1960~70년대에는 가정집 벽에서 떼어 낸 민화들이 하루에도 몇 수레씩 인사동으로 왔다고 한다(같은 책, 14쪽). 
 
이발 모습은 실내 이발소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그 시절, 번듯한 이발소를 갖지 못해도 시골 장터에서, 길거리에서, 이발을 해 주는 이발사들이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 내 야외전시장 '추억의 거리'에 전시된 옛 이발 소품들. 사진/뉴시스
 
난리는 첫째 사람의 정처를 바꿔놓기 마련이다
6·25 뒤
연안 차씨 주백이 아비는
제 마누라하고
제 새끼하고
게다가 이발기계하고 왔다
< … >

키다리 주백이 아비
장날마다
송방 앞에 걸상 하나 놓고
이 사람 저 사람 머리 깎아주고
그것으로 먹고살아간다
어찌나 이발기계가 안 드는지
이발 한번 하려면
생머리 뜯기기 일쑤이고
숫제 결이 고운 머리칼은 깎이지 않는다
낡은 가죽띠에 쓱싹쓱싹
면도날 깨워
비로소 빛나는 면도날 서슬
머리 깎으면
면도해야지
면도하고 나면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을 수 없음이라
(‘이발사 주백이 아비’, 8권)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이발소가 미용실보다 더 많았지만, 70년대 말부터 퇴폐 미용실의 등장과 장발문화의 유행으로 이발소는 점차 쇠락해가고 미용실이 번창하게 된다. 1990년대에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남성들이 미용실로 옮겨 갔고 90년대 후반 IMF이후에는 가격이 저렴한 남성 전용 미용실이 체인점으로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젊은 남성들이 미용실에서 이른바 ‘신개념 이발소’로 불리는 ‘바버숍’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바버숍은 우리말의 이발소를 영어로 바꾸었을 뿐인데, 그 바뀐 영어 속에 이미 영국풍이니 뉴욕풍이니 하는 클래식한 인테리어의 변화와, 피규어·아트 포스터 등 젊은 남성층의 취향을 저격하는 각종 소품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마드를 바른 짧은 머리 모양의 복고풍 부활과 유행, 고급스러운 서비스만큼 훌쩍 뛰어버린 이발·면도 가격이 내포되어 있다. 
 
장인의 이발소를 다시 찾는 이유
 
그런데 화려한 바버숍으로 쏠리는 청년들의 관심이 있다면, 수십 년 된 장인의 이발소를 찾는 이들 중에도 젊은이들이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옛 모습을 찾고 감탄하게 만드는 것일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는 1927년에 문을 연 ‘성우이용원’으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3대인 이남열 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14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이발 기술을 배운 이 장인의 경력은 올해로 57년, 이 최초의 이발소는 오래된 단골들뿐만 아니라 명성을 들은 20대 젊은이들이 문화체험을 위해 갔다가 반해서 돌아오는 알려져 있다. 
 
200년도 넘은 초가집 두 채를 이어 붙였다는 이 이용원은 1959년 사라 호 태풍 때 날아간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꾼 것 외엔 큰 변화 없이 외관도 실내도 사용하는 이발도구들도 역사를 이어 오며 살아 숨 쉬는 매력이 있지만(물을 데우는 연탄난로, 수십 년 된 세면대와 머리를 감길 때 사용하는 낡은 물뿌리개, 140년 된 독일제 면도칼 등등), 무엇보다도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장인의 실력과 마음씀씀이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바탕일 것이다. ‘이발을 완성하는데 37년이 걸렸다’는 이 장인은 놀라운 경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2017년 한 방송에서 ‘지금도 시행착오 끝에 새로운 것을 자꾸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고 ‘이 기술은 끝이 없어서 몇 년 지나면 잘못한 것, 부족한 것이 눈에 들어와 보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또 다른 장인인 지덕용 씨는 1956년 문화이용원 보조원으로 시작해 여든이 넘도록 그곳을 지켜온 이발사이다. 그가 2012년 건강상의 문제로 이용원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단골손님들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 장인들의 실력뿐만 아니라, 손님의 기분을 만져 주고(이남열 씨) 추억을 만져 준다는(지덕용 씨) 그들의 말 속에, 나이 든 이들도 젊은이들도 이 작지만 큰 이발소들을 찾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성북구에서 열린 한 축제에서 추억의 이발소가 재현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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