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석의 재계시각)불 지르려는 ‘이상한 놈’ 당신 기업엔 있는가?
혁신없는 미래준비는 멸망, 과감한 ‘버리기’ 필요
입력 : 2019-04-29 00:00:00 수정 : 2019-04-29 00: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9년 전이다. 2011년 서울 남대문로 5가 씨티타워 16층 STX미래연구원에서 만난 신철식 STX미래연구원장(현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은 기자에게 자신의 역할을 “불을 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아들로, 행정고시 22회로 공직을 시작해 청와대 국무조정실장을 맡은 후 2008년 물러난 지 3년여 만에 민간기업이자 당시 창사 10주년을 맞이한 STX그룹에 부회장으로 입사했던 차였다.
 
불을 지른다는 것은 조직을 흔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표현이었다. 신 부회장은 “앞으로는 지난 10년간 했던 대로 하면 안 된다. 코드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10개년 계획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 비즈니스로는 안 되겠다라는 필요성을 확산시키는 데에만 1년이 걸렸다”고 강조했다. 변화를 기반으로 한 미래 준비가 없다면 기업은 언제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날 만남에서 신 부회장이 들려준 말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앞으로 STX를 비롯한 우리 기업들이 맞이할 10년은 ‘버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다 끌어안고 어떻게 가겠느냐. 과감한 변신이 있어야 한다. 이상한 놈이 나타나 불을 질러야 하는데, STX그룹에서는 제가 그 역할을 하려고 한다. 망하려면 빨리 망하는 게 좋다. 그래야 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직에서 성장한 주역들은 공명심과 인정에 얽매어 제 살을 도려내기 힘들기 때문에 굴러들어온 돌인 자신이 성장을 위한 아픔을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앞줄 왼쪽부터)신철식 STX미래연구원장(부회장)과 강덕수 STX 회장, 이희범 부회장 등 참석자들이 지난 2011년 5월23일 열린 ‘STX 미래연구원’ 개원식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신 부회장의 버림이 시작된 지 얼마 후 STX는 공중분해 됐다. 결과론 적이지만, 신 부회장 같은 ‘이상한 놈’이 1~2년 앞서 STX에 입사했다면 지금까지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21세기 들어 제조업 중공업 부문에서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강덕수 회장의 신화는 지금까지 계속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재미있는 점은 불을 지르는 이상한 놈이 없는 다른 기업들도 2010년대 들어 문을 닫고 자취를 감췄고, 그러려고 하고 있다. 신 부회장의 예견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재계 전면에서 오너 3~4세 체제로 전환되고 있으며 올 연말이면 사실상 마무리 될 것으로 보인다. 선친 아래서 최소 10년 이상 경영수업을 받은 그들은 그룹 사업군들 가운데 과연 앞으로 미래까지 가져갈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러워 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며, 이들을 어떻게 아름답게 버리거나 포기할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선친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이재용·정의선·구광모 등 주요 그룹 오너들이 ‘이상한 놈’을 자처해 비주력사업을 매각하거나, 주력사업 내에서도 수익이 나지 않는 부분을 과감히 정리해나가고 있다. 이럴 때 기업에 더 많은 불을 지르려는 이상한 놈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당신 기업엔 이상한 놈이 있는가.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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