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론’ 두산, 24개 계열사와 '아름다운 이별'
입력 : 2019-04-29 00:00:00 수정 : 2019-04-29 00: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나에게도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
 
‘포기경영’의 원조 기업으로 늘 거론되는 두산의 ‘버림의 미학’은 고 박용곤 명예회장이 강조한 이같은 내용의 ‘걸레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올해로 창립 123주년을 맞이한 국내 최고(最古) 기업 두산의 역동적인 변화의 양대 원천은 ‘사람’과 바로 ‘인수·합병(M&A)’이다.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22년간 두산그룹은 26개사를 사고, 24개사를 팔았다. 매년 1개꼴 기업을 인수하고 매각했다. 2017말 기준 두산그룹 계열사 수가 25개사(금융사 포함)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 기간 동안 지주회사인 (주)두산과 두산건설, 오리콤 등을 제외하면 계열사가 모두 바뀌었다. 현재의 계열사들도 언제까지 그룹에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두산의 M&A 전략을 말할 때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두산밥캣 등 현재의 인프라스트럭처서포트 비즈니스(ISB) 사업을 완성한 굵직한 기업 인수를 강조한다. 하지만 두산의 실질적인 위력은 계열사 식구들과의 ‘아름다운 이별’이 더 의미 있다. 두산 M&A가 90%에 이르는 높은 성공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기업을 인수했을 때나 팔 때 임직원들의 반발 등 잡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거래에서든지 해당 기업의 임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일을 진행하는 게 제1원칙이다. 인수시에는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극대화하고 상호 시너지 창출을 위함이라고 설득, ‘점령군’ 이미지를 지운다. 매각할 때에는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금액은 적더라도 고용을 승계하고 기업가치를 더욱 키워줄 파트너를 선택한다고 한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가운데)이 ‘두산인 봉사의 날’ 맞아 지난 23일 임직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 가정에 전달할 가구를 제작하고 있다. 사진/두산그룹
 
지난 2009년 9월3일 두산그룹은 삼화왕관 사업부문, SRS코리아, 두산DST 등 자회사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4개사 지분을 총 7808억원에 매각했다고 발표했는데 방법이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재무적 투자자인 두 개의 사모투자펀드(PEF)와 손잡고 두산과 PEF가 각각 2800억원, 2700억원을 출자해 DIP홀딩스, 오딘홀딩스라는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했다. SPC는 이 돈으로 3개 자회사와 KAI 지분을 각각 51대 49의 비율로 인수했고, 5년간 이들 회사의 주인이 돼 회사의 새주인을 찾는 방식이다. 자회사의 경영권은 두산이 유지하고, PEF는 경영 실적에 따른 배당수익만 받는 대신 능력 있는 투자자가 나설 경우 5년 기간 내 아무 때나 지분을 매각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방식이다.
 
두산그룹이 4개사 지분 매각을 추진하려고 했던 시기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기 때문에 사려는 기업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산그룹은 진행하고 있는 계열사 매각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이를 위해 두산그룹이나 계열사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고, 매각 대상 기업의 지분을 일부 팔면서 경영권은 두산이 그대로 유지하는, 매각과 투자유치가 결합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면서 두산의 그늘을 떠나는 두려움이 컸던 임직원들의 동요도 무마하면서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는 시간도 벌었다. 이후 4개사는 좋은 주인을 찾아 새출발했다.
 
4개사 매각 방식은 사실 두산에겐 처음은 아니었다. 1998년 OB맥주를 당시 세계 4위 맥주업체였던 벨기에 인터부르에게 매각할 때 사용한 방법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었다. 당시 두산은 인터브루에게 OB맥주 지분 50%를 내주는 대신 동일한 지분의 독립법인으로 재탄생시켜 공동 경영을 하자고 제안했다. 인터브루는 두산의 요청을 받아들여 총 3500억원에 OB맥주 지분 절반을 인수했고, 독립법인 이사회는 양사가 4명씩 선임했다. 한국시장을 잘 몰랐던 인터브루는 두산을 안전장치로 삼아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두산도 OB맥주 지분 전량을 한꺼번에 팔았을 때의 금액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향후 경영 성과에 따라 지분만큼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인터브루와의 합작 후 OB맥주는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해 영업 및 재무환경을 크게 개선하는 한편 진로쿠어스맥주(현 카스맥주)를 인수하는 등 시장 지배력을 키웠다. 이를 통해 2001년 두산은 네덜란드 투자회사 홉스에 OB맥주 지분 45%를 5600억원에 매각했다. 3년여 만에 2000억원 더 비싼 가격에 팔았다.
 
두산이 이러한 계열사 매각 방식을 고안한 것은 단순히 기업을 판다는 생각을 넘어 기업 매각은 또 다른 투자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됐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M&A는 결혼과 같기 때문에 궁합이 맞으면 매각 후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업을 직접 진행하는 회사와 PEF가 윈-윈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냈다”면서 “그러면서 두산은 늘 매각 회사 임직원들의 고용안정과 더 많은 보상을 해 줄 것을 제안했다. 매각 대금 액수를 줄이더라도 떠나는 계열사 임직원들의 능력은 확실히 인정해 줄 것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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