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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충분히 좋은 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2019-05-14 11:34:22 2019-05-14 11:34:22
최근에 한국에서는 세월호 침몰, GOP 총기난사 등 충격적 사고와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적으로 늘 있어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변화가 엿보입니다. 객관적 유형이 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침몰 사고는 여전히 침몰 사고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사고로 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를테면 ‘증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증상으로 말입니다.
 
암과 같은 질병처럼, 우리는 외과적으로 증상의 환부를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려낼 수 없는 증상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나 그것이 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뿌리 깊은 태도의 문제일 때, 한 사회를 지탱하는 교육 기제나 억압 기제나 문명 기제 같은 것의 문제일 때, 우리는 무엇을 제거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증상을 해석되어야 할 증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증상이 무엇보다도 우선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적으로 해석될 때에만, 해석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때에만 사라지는 증상이 있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처음에 한 개인의 증상만을 해석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신분석 이론은 프로이트 이후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증상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증상의 경우 단지 해석하는 것만으로 증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해석은 실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올바른 실천을 위해선 그 증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거나, 단지 개인의 심층 심리를 다루는 일종의 부르주아 학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여러 정신분석학의 용어들에 익숙해져 있으며, 이는 정신분석학이 확산되었다기보다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병리적인 사회적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부터 일반 시민들은 자신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그것에 대한 자신의 불안한 반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사람들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사회적 사건들이 집단 심리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 심리는 다시 개개인의 심리적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창간 6주년을 맞아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와 공동으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증상에 대해 진단하고, 그 처방을 찾는 작업을 벌이고자 합니다.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예리한 통찰력과 시각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또한 이웃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사진/뉴시스
 
글의 연재 순서와 필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1회: 불안 -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철학)
2회: 관계 - 이성민(도서출판b 기획위원, 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철학)
3회: 돈 - 김석(건국대, 철학)
4회: 성숙과 정체성 - 백상현(수원대, 철학)
5회: 증오와 폭력 - 어도선(고려대, 영어학)
6회: 사랑 - 정지은(홍익대, 미학)
7회: 외모 - 정경훈(아주대, 영문학)
8회: 직업 - 이성민(도서출판b 기획위원, 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철학)
9회: 중독 -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철학)
10회: 무관심 - 김서영(광운대, 철학)
11회: 지식 - 김소연(연세대, 영화학)
12회: 권력 - 김석(건국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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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불안
우리는 왜 “충분히 좋은 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홍준기 | 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오늘날 정신분석(학)이 풀어야 할 과제는 개인적 “힐링”과 사회적 “힐링”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발전시키면서 신경증 혹은 더 넓게 말하면 정신병리 현상은 단순히 개인적 문제가 아님을 역설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문제는 정신분석학에서는 물론 인문학, 사회과학, 생물학 등 모든 분야에서 항상 논쟁의 핵심이 되는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는 예를 들면, ‘개인이 먼저인가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병드는 이유는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인가? 혹은 개인과 사회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방식으로 제기되며, 각자는 자신의 성향과 이론적 틀, 혹은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따라 나름대로의 대답을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으므로 정신분석학은 개인을 논함에 있어 사회문제를 등한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가들은 주로 개인치료에 집중해왔다. 사회문제에 주로 관심을 갖는 논자들이 자주 주장하듯이 개인치료 혹은 정신분석 그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은 소위 ‘자아심리학’(크리스, 하르트만)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응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개인을 치료해왔다. 그러나 정신분석 내부에서도 이론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고 그러한 노력이 이제 정신분석학계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분석가 중에서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환경 문제에도 주목하고 이러한 문제를 동시에 주목하면서 정신분석 이론과 임상을 재구성한 사람으로는 멜라니 클라인(M. Klein)과 비온(W. Bion),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 등이 있다. 이들은 아이의 성장에서 어머니의 역할, 그리고 환경의 역할에 가장 많이 주목한 정신분석가이다(물론 이들이 모두 완전히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씩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니콧과 애증관계 속에 있었던 보울비(Bowlby)라는 임상가도 아이의 성장에서 애착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정신분석이론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했다. 라캉은 어떠한가? 라캉은 자신의 이론 구성 초기에서부터 헤겔의 욕망이론을 참조하면서 개인과 타자의 관계에 주목한 분석가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에서의 개인주의를 극복하고자 인간 주체의 구조를 타자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처음부터 설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인 것이다.
 
프로이트도 그러했고, 그 이후의 탁월한 분석가들은 궁극적으로 개인과 환경, 사회의 관계에 일정 정도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신분석은 그 어떤 다른 학문도 주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경멸해왔던 개인의 환상과 내밀한 무의식에 주목하며 인간 해방에 기여했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힐링” 열풍이 불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분석이론은 우리의 삶과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이론과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있다. 정신분석학은 아직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라캉도 예외는 아니다(그리고 라캉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지젝, 바디우, 들뢰즈, 네그리는 물론 많은 현대철학자들,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무관한 인문, 사회과학자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말하면, 필자의 정신분석치료 경험에 따르면 오늘날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정신병리의 상당부분은 여전히 사회적 이유로 생겨나는데(예컨대 자살, 우울증, 묻지마 범죄, 일베의 ‘비인간적’ 행위 등), 오늘날 정신분석학에는 이러한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과 이론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개인적 차원은 물론 사회적 맥락에서 개인을 사유하고 치료할 수 있는 개념들과 이론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를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방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예컨대 실업을 당해도 믿을 만한 사회적 안전망이 있다면 자살이나 극단적 우울증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실업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불의에 대해 좀 더 용기 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국가’이며 이와 관련된 정신분석 이론 및 정치철학의 구성과 정신분석의 ‘사회적인’ 임상실천의 필요성이다. 언급했듯이 이미 정신분석 임상에서도 좁은 의미의 가족이라는 모델을 넘어 보다 넓은 의미의 환경의 중요성(교육기관, 사회, 또래 집단 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또 국가를 논해야 하는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국가의 문제를 사유해야 할 이론적, 실천적 이유가 있는가?
 
정신분석학은 여전히 개인주의적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한계 때문이다. 개인의 고통스러운 심리적 문제를 다루지 않는 치료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치료라는 임상적 실천 그 자체를 비판하며 모든 것을 사회문제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이론(예컨대 공산주의나 사회과학주의)은 잘못이다. 하지만 모든 개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라는 ‘컨테이너’를 완전히 무시하는 ‘개인주의적 정신분석학 혹은 치료이론’도 오류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보다 혁신적인 이론 및 실천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개인적 차원에서의 치료라는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더 넓은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과 국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정신분석적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안’ 그리고 불안을 극복하게 해줄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 이래로 정신분석은 ‘불안을 이해하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불안은 개인과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가장 강력한 불안은 무엇보다도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발생시킨다. 프로이트 이론을 발전시켜 정신병적 불안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이론을 남긴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은 ‘엄마의 부재’를 견딜 수 없는 어린아이가 죽음의 공포를 견딜 수 없을 때 발생한다. 클라인에 따르면 생후 초기에 아이들은 망상-분열적 위치(paranoid-schizoid position, PS)(1)와 우울적 위치(depressive position, D)를 거친다. 망상-분열적 위치(생후 3개월 정도까지)에서 아이들은 엄마를 전체적 대상이 아니라 파편화된 부분적 대상으로 인지한다. 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있을 때 엄마의 가슴을 완전한 대상으로 느끼고, 일시적으로라도 젖을 뗄 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엄마의 젖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끼고 엄청난 불안(죽음의 공포)에 빠진다. 클라인은 이를 박해불안이라고 부른다. 엄마의 가슴(즉 젖을 주는 ‘좋은 가슴’)의 부재라는 단순한 현상이 너무 오래 지속될 때 생겨나는 결과는 치명적이다. 부재하는 가슴이라는 심연은 아이의 환상 속에서 ‘아이를 조각내고 삼키는 괴물’, 즉 ‘나쁜 가슴’으로 변화한다. 후기 클라인주의자인 비온은 나쁜 가슴을 좋은 가슴의 부재가 박해하는 대상의 현존으로 변화된 것으로 설명한다. 심리적 안정망(엄마의 가슴)의 지속적인 부재는 아이에게 파멸의 불안을 야기하고 아이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대상(엄마) 혹은 타인을 공격하거나 완벽하게 이상화한다.
 
망상-분열적 위치에 있는 아이는 아직 엄마가 곧 돌아와서 자신에게 젖을 줄 거라는 인식과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부재가 일정 시기를 넘어서면 아이는 박해망상과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고 만다. 클라인이 발견한 망상-분열적 위치는 모든 아이들의 생의 초기에 거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인 과정에서 정상적인 ‘좋은 엄마’가 존재하지 않을 때 이 아이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고 만다. 클라인은 망상-분열적 위치에서 우울적 위치로의 변화를 ‘정상적인 주체’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 본다.
 
우울적 위치란 엄마를 부분대상으로 지각하던 아이가 엄마를 전체적 대상, 안전감을 제공하는 인격적 대상으로 지각하게 되는 시기이다. 반대로 망상-분열적 시기에서는 아이는 엄마라는 대상을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의 전체적인 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 예를 들면 젖가슴으로 지각한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은 좋은 대상, 그렇지 않은 가슴은 나쁜 대상으로 지각하고 치명적인 불안에 빠지는 것이다. 망상-분열적 위치에서 우울적 위치로의 변화(PS→D)는 인간발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가 엄마를 전체적 대상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엄마를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기에게 일시적으로 젖을 주지 않고 사라져도 아이는 엄마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다시 안전감과 먹을 것, 그리고 따뜻함을 줄 엄마로 인해 치명적인 죽음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요컨대, 정신분열증이 발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클라인에 따르면 아이가 이렇듯 우울적 위치로 자신의 심리적 위치를 옮길 수 있기 위해서는 엄마가 아이를 지탱해주는 따뜻함과 안전감을 제공해줄 수 있는 “좋은 엄마”(클라인) 혹은 “충분히 좋은 엄마”(위니콧)의 역할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울적 위치는 아이가 엄마의 부재, 즉 가슴의 부재라는 좌절을 견딜 수 있는 주체로 성장해가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인데, 이렇듯 아이가 좌절을 견디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성숙한 자아를 갖출 수 있기 위해서는 엄마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좌절을 견디기, 즉 ‘홀로서기’는 엄마라는 안정감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인의 경우에도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는 이유도 바로 이 시기에 충분하게 좋은 엄마의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주 핵심적인 내용만 간단히 서술했지만 멜라니 클라인 정신분석학은 개인은 물론 사회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의 심리 구조를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으로 나누는데, 도착증과 신경증은 정신병적 불안에 대한 방어로 형성되는 심리구조이다. 물론 도착증은 여전히 정신병적 불안의 흔적을 신경증보다는 더 많이 보유하고 있는 심리구조라고 할 수 있다.(2) 신경증, 예컨대 강박증 역시 정신병적 불안에 대한 방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 점을 강조한 것이 멜라니 클라인의 업적 중 하나이다). 강박증자가 갖고 있는 엄청난 불안의 강도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강박증환자가 권위자(예를 들면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직장상사)에 대해 갖고 있는 엄청난 불안-처벌, 유기, 축출 혹은 실직 등의 불안 역시 초기 어린 시절, 즉 망상-분열적 위치에서 획득한 불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강박증자는 우울적 위치를 잘 통과했기 때문에 정신분열증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되었지만 여전히 박해불안, 유기불안, 분리불안, 파멸의 불안 등 다양한 불안으로 인해 고통 받는 주체이다. 다양한 중독현상(게임중독,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등), 청소년 비행과 범죄 혹은 폭력, 도벽, 그리고 다양한 도착적 현상(성중독 및 성범죄 등)도 정신병적 불안을 완화시키려는 -그러나 불행히도 ‘병리적인’-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클라인은 또한 매우 중요한 (사회이론으로 확대될 수 있는) 정신분석적 진리를 덧붙인다. 망상-분열적 위치를 성공적으로 통과한다는 것은 자신을 홀로 내버려두는 엄마에 대한 망상적 증오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엄마가 “좋은 엄마”여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이다. 클라인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이어받아, 개인과 환경 사이의 ‘변증법’을 가장 이론적인 방식으로 최초로 정립한 분석가이다. 이러한 클라인 이론이 갖는 임상적, 사회이론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자유-자유는 홀로 있음을 견딜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그 자유의 전제 조건인 (가족적, 사회적) 환경-심리적, 물질적 안정감-을 반드시 요청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엄마를 국가라는 개념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현대사회에는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는’ 수많은 남녀들로 가득하다. 클라인 이론은 다음과 같은 사회(철학)적 함의를 갖는다. 한 개인의 성숙은 개인적 문제지만, 그것은 동시에 환경(엄마, 그리고 사회적 안정망)의 문제이다.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는 불안하고 우울한 아이와 성인은 자신을 그렇게 내버려 둔 엄마(즉 타인)를 망상 속에서 공격 혹은 파괴한다. 이는 성인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홀로 내버려둔 엄마를 공격한다는 것은 또한 역으로 엄마가 다시 아이 자신을 공격하고 파괴할 것이라는 박해망상을 불러일으킨다.
 
클라인 이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점은 아이가 망상-분열적 위치를 빠져나와 우울적 위치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혼자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우울과 불안을 견딜 수 없는 아이는 다시 ‘망상-분열적 위치’로 퇴행한다는 것이다. 망상-분열적 단계에서는 엄마라는 대상을 이제 더 이상 전체적 대상으로 지각하지 않으므로 타인을 파괴하고자 하는 공격성을 표출해도 더 이상 죄의식과 우울적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망상-분열증 상태가 우울적 위치보다 ‘더 편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분열적인 최악의 박해 및 파멸의 불안을 경험하며, 이는 다시금 엄마, 즉 타인을 파괴하는 공격성으로 변화되어 표출된다. 클라인이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듯이 이는 임상적으로 확증되는 사실이다. 주체가 망상-분열적 위치로부터 벗어나도 여전히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우울적 불안에 빠진다. 이때 주체는 이를 견딜 수 없어서 ‘무감각한 상태’인 망상-분열적 위치로 다시 퇴행한다. 죄의식과 우울적 불안 때문에 고통을 받지는 않아도 되는 ‘망상-분열적 위치’로 퇴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퇴행의 대가는 더 무서운 박해망상, 파멸의 불안이다.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 주체는 이제 피해망상 속에서 속죄양을 찾아 엄마와 타인을 다시 공격한다. 이렇듯 망상-분열적 위치와 우울적 위치는 쉽게 교환된다는 것인데, 비온은 이를 ‘PS↔D’라고 표현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사회의 모습 아닌가? 세월호 사건, 자사고 폐지 문제, 일베의 폭식 투쟁 등을 보면서 이제 ‘도덕적 불감증’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어떤 네티즌은 ‘우리나라가 드디어 망조가 들었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는 신경증적 사회였다면 이제는 ‘망상-분열적’ 사회가 되었다.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정도를 넘어서 박해망상 속에서 타인을 조롱하고 공격하며, 나만 ‘좋은 엄마의 젖’을 먹겠다는 망상-분열적 사회가 되었다.
 
지면이 부족하므로 다음과 정리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도덕성과 죄의식의 부재, 타인에 대한 망상-분열적 공격과 착취, 그리고 망상-분열상태에서 발생하는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는(그리고 그것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에서 “(충분히) 좋은 엄마”를 필요로 한다. 물론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이다. 최근 스웨덴 총선에서 사민당의 승리는 ‘국민의 집’, 즉 충분히 좋은 국가를 복원하려는 국민들의 염원의 승리가 아니겠는가? 비록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지만, 스칸디나비아의 복지국가 모델을 꿈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 염원도 마찬가지로 이해해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는 물론 성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윤리적인 국가’를 필요로 한다. 각 개인들에게 충분하게 심리적, 물질적 안정감을 확보해줌으로써 불안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 열등감과 패배의식, 격심한 경쟁, 폭력과 공격성, 기만과 부패 등,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온갖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한 엄마와도 같은 국가-“충분히 좋은 국가” “사회적 국가”(헤겔)-를 절실히 요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위니콧의 개념을 변형해 만든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용어의 사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용어의 의미가 오직 위니콧의 이론만으로 다 설명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이 개념이 지닌 정신분석학적, 심리적 함의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족관계를 넘어서 ‘충분히 좋은 엄마와 같은 국가’라는 사회이론적 의미로 확대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은 특히 클라인, 그리고 비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캉 정신분석이론과 다양한 정신분석가들의 기여를 비판적으로 종합함으로써만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임상적-정치철학적’ 개념이다. 물론 이것은 철학적 관점에서는 헤겔 철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용어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의 실천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용어이다.
 
필자는 불안으로부터 출발해 충분히 좋은 국가 개념으로 논의를 확대했다. 끝으로 이러한 이론적 전개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논의를 마치기로 하자. 홉스로부터 시작해 로크, 루소, 칸트에 이르기까지 근대철학자들은 자연법과 사회계약론의 이름으로 국가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여기에서 불안이 핵심적인 ‘매개’의 역할을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종식시켜 줄 국가를 요구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국가는 자연상태에서 각 개인에게 발생하는 생명과 재산의 위협, 즉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불안에 대한 대답이었다. 처절한 서로간의 투쟁이 야기하는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각 개인은 국가에 자신의 주권을 양도했다. 물론 홉스는 권위적인 군주제 국가를 염두에 두었고, 이에 대한 비판으로 로크의 국가론이 나왔다. 로크의 국가론과 홉스의 국가론은 겉으로 보기보다 유사성이 훨씬 많다. <시민정부론>에서 로크는 각 개인은 불안 때문에(즉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설립하는 사회계약을 맺는다는 논제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 국가는 재산과 생명의 보호를 위해서만 최소한으로만 개입하는 자유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헤겔은 <법철학>에서 이러한 논의를 비판하면서 국가는 각 개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역할은 물론, 보다 적극적으로 개인들의 복지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적극적이고 윤리적인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그 점에서 헤겔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의 진정한 선구자이다).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오랜 비판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저명한 헤겔 연구가 디터 헨리히(D. Henrich)가 지적했듯이 <법철학>은 헤겔의 저작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이 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헤겔이 제시한 국가 모델을 실제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성의 간지’는 불안을 매개로 정신분석학과 정치철학이 헤겔이 염원한 민주적인 윤리적 국가, 사회적 국가 속에서 만나고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러한 충분히 좋은 국가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파국과 불안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글·홍준기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라캉과 현대 철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라캉과 현대철학> 등이 있다. 역서로는 <라캉과 정신분석 임상: 구조와 도착증>, <강박증: 의무의 감옥> 등이 있다.
(‘paranoid-schizoid position’을 일반적으로 편집-분열적 위치라고 번역하지만 필자는 ‘paranoid’가 망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중시해 이하에서 망상-분열증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정신병과 도착증, 신경증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조엘 도르, 홍준기 옮김, <라캉과 정신분석임상: 구조와 도착증>, 아난케, 2005 참조. 여기에서 상세히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라캉 이론 역시 멜라니 클라인의 임상론을 고려해야만 보다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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