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세상읽기)직선은 탐욕
입력 : 2019-06-07 06:00:00 수정 : 2019-06-07 06:00:00
지구 역사 46억 년, 생명의 역사 38억 년 동안 모든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았다. 그게 생명의 기본자세다. 그런데 대략 1만 2천 년 전, 지구는 황당한 일을 당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대신 자신의 필요에 따라 환경을 바꾸는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다. 바로 호모 사피엔스다. 사람들이 갑자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멀쩡한 들판에 불을 지르고 알아서 잘 흐르던 물길을 돌려서 밭을 일구고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직선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알았다. 직선이 편하다는 것을 말이다. 방을 네모반듯하게 지었고, 도시에 큰길을 곧게 내었다. 심지어 멀쩡하게 굽이굽이 잘 흐르던 강물마저도 직선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만든 직선은 지구 규모에서 보면 극히 짧았다. 아무리 큰길이라고 하더라도 직선 구간은 몇 킬로미터를 넘지 않았다. 산과 강의 규모가 인간의 힘에 비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모난 방의 네모난 책상에 앉아 네모난 벽에 붙어 있는 네모난 지도를 보는 사람에게 자연은 전혀 압도적이지 않다. 그의 눈에 지구는 그저 평평하며 네모일 뿐이다. 1945년 미국 육군의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은 벽에 걸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에 가로 선을 하나 그었다. 그럴싸했다. 이 지도는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대통령은 다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했다. 소련은 군소리 없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38선이 그어졌다. 
 
38선은 직선이다. 자연에 없는 직선이다. 한반도의 산맥과 강 같은 지형, 그리고 자연생태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직선이다. 당시 행정구역과도 상관이 없었다. 연천, 양구, 인제, 양양, 벽성이 남북으로 쪼개졌다. 길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갈라진 것도 아니다. 그냥 두 장교가 지도에 그은 직선에 따라 마을이 쪼개졌다. 사람들이 갈라섰다. 38선에 비하면 현재 휴전선은 훨씬 자연친화적이다. 
 
지도에 직선을 긋는 행위는 두 장교가 창의성을 발휘한 게 아니다. 이미 전례가 있었다. 19세기말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 독일은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탐욕 때문에 식민지를 지배하는데, 분쟁에는 비용이 든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한다는 것. 실용적인 탐욕은 평화라는 가면을 쓴다. 
 
당시 유럽 평화의 중심축은 독일 비스마르크 수상이었다. 1884년 비스마르크는 아프리카 지배에 관한 쟁점을 정리하기 위한 '베를린 회의'를 소집한다. 여기에는 미국을 포함하여 15개 나라가 참여했다. 베를린 회의는 효율적인 결론을 내렸다. 각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도 편리한 국경을 정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지형이 없다면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 선의 근거는 경도와 위도에 따라 정해졌다. 아프리카는 직선이 많은 대륙이 되었다. 얼마나 근사한가. 
 
한반도의 38선이 지형이나 마을을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아프리카 국경 역시 원주민의 문화와 인종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직까지도 정치적 불안과 인종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도에 직선을 긋는 버릇이 베를린 회의에서 처음 생긴 게 아니다. 역사는 5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5세기 말, 전 지구의 대양을 누비는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뿐이었다. 스페인은 서쪽에 있는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향하는 아시아 항로 개척과 무역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각자 알아서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차지하면 될 텐데 스페인은 1493년 지도 위의 서경 38도 지점에 세로 선을 하나 그었다(38은 참으로 기구한 숫자다). 서경 38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선언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철수해야 한다. 당연히 포르투갈은 반발했다. 하지만 굳이 전쟁을 할 필요는 없다. 평화라는 가면을 쓰는 게 더 값싼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중재로 1년 동안 협상을 거쳐서 1494년 6월 7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서경 38도 대신 서경 43도 37분을 기준으로 지구를 갈랐다. 덕분에 브라질은 지금도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대신 필리핀이 스페인의 지배에 들어갔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마치 38선이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이익이고, 아프리카의 직선 국경이 유럽 식민제국 모두에게 유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작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직선은 자연적이지 않다. 직선은 탐욕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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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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