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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나를 찾아줘’, 원죄 의식 건드린 어린 시선의 ‘고통’
아이 잃은 부모의 삶,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남은 희망과 고통
어린 삶 짓밟는 어른의 왜곡된 현실, 원죄 의식 묻는 ‘날카로움’
2019-11-25 00:00:01 2019-11-25 00:00:0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끔찍하다. 사실 이 단어로도 부족하다. 성인 관객들조차 이 영화의 감정과 세계 그리고 얘기와 상황을 받아 들이기 힘들다. 이건 힘들다란 단어로도 한 없이 부족하다. 고통에 고통을 주고 그 안에서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낸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고 현실 관객들에게 무슨 애기를 전하려고 하는 것 일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은 견디는 게 아니다. 그저 감내하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상황 자체를 직시하란 것뿐이다. 영화 나를 찾아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정연(이영애) 6년 전 아들을 잃어 버렸다. 잃어 버린 게 중요하다. 과정은 생략됐다. 정연과 남편 명국(박해준)은 전국 팔도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닌다. 그들의 모습에서 아들을 잃은 감정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받아 들이고 있다. 상황을 받아 들이는 게 아니다. 아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받아 들이고 있다. 희망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잡히지 않는 파랑새다. 희망은 고문이다. 고통스럽지만 희망이 있기에 견딘다.
 
정연과 명국은 희망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아들이 돌아오는 날을 꿈꾼다. 아들이 보이는 것 같다. 아들을 보고 싶다. 집에는 아들의 흔적과 채취가 아직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희망이고 고문이다. 아들의 현재가 상상이 안 된다. 아들은 그저 과거에 머문 기억이다. 정연에게 명국에게 아들 윤수는 희망이지만 고통이다. 그 고통을 감내하며 현실을 버티는 서로가 고맙고 미안하다. 그게 더 괴롭다. 현실 자체가 괴롭고 지옥이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리고 정연과 명국 부부에게 진짜 희망이 다가온다. 아들을 봤단 제보가 왔다. 하지만 장난 전화다. 명국은 아들을 만나러 가던 중 명국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정연은 이제 버틸 힘 조차 없다. 현실은 이제 진짜 지옥이다. 파랑새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제보가 온다. 어느 섬 낚시터. 아들과 똑같이 생긴 남자 아이를 봤단 제보. 정연은 희망도 버팀도 없는 상황에서 그곳으로 간다. 미련일 뿐이다. 직시해야 한다. 무엇이 이런 고통과 지옥을 만들었는지.
 
우선 그곳은 이상했다. 모두가 이상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아이가 있는 것 같지만 아이가 없단다. 이 섬을 관할하는 파출소에 근무하는 홍경장(유재명)까지도 이상하다. 모두가 정연을 경계하고 배척한다. 정연은 이상하다. 직감이다. 엄마로서 알 수가 있다. 내 아이가 여기에 있다. 아이를 찾아야 한다. 희망이 아니다. 이젠 현실도 중요하지 않다.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마주한 현실은 지옥 같은 고통이 아니다. 지옥이지만 버틸 수 있는 희망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지옥이었다. 이제 정연은 무너지는 게 아니다. 지옥과 마주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들을 찾아야 한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나를 찾아줘는 익히 알고 있었고, 또 알고 있지만 대면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우리의 현실이다. 폐쇄적인 지방 소도시 커뮤니티의 비윤리적 비상식적 비인간적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인격과 비인격이 충돌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직시한다. 문제 해결과 현실 타파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했고 대면하기 불편해 했던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 현실에 감독은 이영애를 집어 넣었다.
 
이영애는 두 가지를 갖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만들어 낸 복수 이미지가 첫 번째다. ‘나를 찾아줘에서 그는 친절한 금자씨마녀 이금자를 끌어 온다.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감정을 끌고 온다. 감정이 그대로는 아니다. 복수 이미지 속에 이영애의 두 번째를 더했다. 엄마다. 그는 14년 만의 복귀작으로 나를 찾아줘를 선택했다. 그 시간 동안 이영애는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됐다. 엄마 이영애는 다르다. 느끼는 고통의 감정이 다르다. ‘금자씨복수가 칼날이었다면 엄마 정연의 복수는 모성이다. ‘나를 찾아줘정연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참을 수 있다. 그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복수의 감성을 끄집어 낸다. 번뜩이는 칼날이 아니다. 처연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 아픈 복수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단 후회와 미안함 죄스러움이 묻어 있다. 단죄의 방식이 잔인하고 가학적이지만 통쾌하지도 않다. 이건 오롯이 모성의 죄스러움이 묻어 난 원인이자 근본이다. 그래서 나를 찾아줘의 이영애는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처연하고 또 구슬프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마지막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럽게 다가온 처연한 구슬픔은 시커먼 갯벌 위에 남은 거짓뿐이다. 현실은 그저 정연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으로까지 밀어 붙이면서도 더욱 더 가혹하기만 할 뿐이다. 도대체 무너져야 이 상황이 끝이 날 것인지. 그래서 나를 찾아줘는 찾아 달라는 외침에 선뜻 답을 내놓기도 두렵다. 귀를 기울이기도 무섭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죄를 묻는다. ‘나를 찾아달라고 외치는 어린 그들의 간절함을 외면하고 이용하고 짓밟은 우리는 모두가 원죄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범이고 죄인일 뿐이다. 우린 그저 바라보고 지켜봤을 뿐이다. 고통을 외면하고 대면했지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홍경장의 죄의식이 간악하기 보단 가슴을 후벼 파는 번뜩이는 바늘처럼 느껴진다. 모두의 가슴 속에 숨은 그 작은 원죄의 한 점을 찌르고 누른다. 그 고통을 이용하는 정연의 가족조차 간악스럽지만 현실이라고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현실이 고통이라면 나를 찾아줘는 오히려 현실의 악을 지켜본 선의 시선일 뿐이다. 이 영화가 고통스럽단 것은 그저 바라보고 공감한다고 착각하며, 슬픔으로 포장해 외면하고 있던 우리 모두의 원죄를 건드린 그 선의 시선이 불편한 것뿐이다.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지만 꼭 지켜봐야 할 현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1 27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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