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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텔레비전에서 봤다니까!
2019-11-29 06:00:00 2019-11-29 06:00:00
맞춤법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술자리에 가끔 안주거리로 올라오는 빵이 하나 있다.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뭐가 맞을까? '카스티야의 빵'이란 뜻의 '팡 드 카스텔라(pão de Castela)'에서 유래했고 영어 표기는 Castella이니 당연히 '카스텔라'라고 표기해야 맞다. 하지만 카스텔라는 왠지 어색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카스테라라고 한다. 일본을 통해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다. 플라자(plaza)를 프라자라고 하는 호텔이나 패밀리(family)를 훼미리라고 하는 편의점도 마찬가지 경우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이며 누구나 편한 대로 쓰자고 주장하는 분들과 달리 타고난 모범생인 나는 규칙이라고 이름 붙은 것은 모두 지키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나도 카스텔라보다는 카스테라라고 쓰고 싶다.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먹던 카스텔라와 우리나라에서 먹는 카스테라는 조금 다른 빵처럼 느껴진다. 그야말로 느낌에 불과하니 술자리 갑론을박에서는 감히 주장하지 못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음식문헌연구자 고영 선생님의 최근 경향신문 칼럼 '카스텔라와 카스테라 사이에서'에서 힌트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16세기 말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카스텔라가 도입됐다. 일본인들은 카스텔라 조리법의 원리를 파악해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자원을 이용해서 새로운 빵을 만들어냈다. "맥아당, 꿀, 설탕을 섬세하게 매만진 끝에 구현한 쨍하면서 깊은 단맛, 우유와 벌꿀이 배가한 풍미, 찜의 여운이 있는 스펀지의 물성 등은 이베리아 카스텔라와는 다른 카스테라의 속성이고 개성이다." 포르투갈은 카스텔라의 시조이고 일본은 카스테라의 시조인 셈이다. 
 
우리 가족은 겨울에 유니클로 히트텍을 입고 일본 여행을 가곤 했다. 일본은 가까운 나라다.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문화는 편안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를 선사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대중교통이 발달했으며 심지어 여행비용도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여행보다 덜 들기도 한다. 음식 기행은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특히 나가사끼에 갔을 때 짬뽕과 카스테라의 추억은 유난하다. 하지만 아무리 카스테라가 좋고 활화산을 보고 싶어도 당분간은 일본 여행은 피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아베 때문이다. 외교문제가 해결되면 일본은 다시 가족 여행지가 될 테지만 아직은 절대 아니다.
 
일본 과자 카스테라는 오늘날 동아시아 사람들이 공유한다고 한다는 고영 선생님 말씀처럼 대만에서도 카스텔라가 아니라 카스테라를 맛볼 수 있다. 대만에 여행 가면 단수이 라오제 거리의 대왕 카스테라를 만날 수 있다. 무시무시하게 크다는 게 판매 콘셉트다. 하나 사두면 3박 4일 체류 기간 동안 아침식사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한다. 요즘 서울에 없는 게 어디 있겠는가. 나가사끼 카스테라도 들어왔고 단수이 대왕 카스테라도 들어왔다. 그런데 대왕 카스테라는 한국에서 불쾌한 경험을 해야 했다. 인기를 누리던 대왕 카스테라 가게가 일시에 망한 것이다. 뭐가 문제였을까? 놀랍게도 언론이 문제였다.
 
2017년 3월 모 종편방송에서 대왕 카스테라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대왕 카스테라를 만들 때 우유와 달걀보다 식용유가 더 많이 들어간다, 심지어 손바닥 네 개만 한 500그램짜리 카스테라 하나 만드는 데 식용유를 700밀리리터를 붓기도 한다는 게 고발의 핵심. TV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방송 후 불과 열흘 사이에 대왕 카스테라 매출이 90퍼센트 가까이 떨어졌다. 
 
방송을 보고서 대왕 카스테라를 끊은 소비자의 선택은 타당해 보인다. 식용유의 열량은 100밀리리터당 884킬로칼로리에 달한다. 또 식용유의 밀도는 약 0.9 정도이니 500그램짜리 대왕 카스테라 하나를 먹을 때마다 오로지 식용유만으로도 5×884÷0.9≒5000킬로칼로리나 된다. 아무리 맛있어도 이런 칼로리 폭탄을 먹을 수는 없다. 
 
그런데 따져보지 않은 게 있다. 식용유 가격이다. 아무리 식용유를 대량으로 구입한다고 해도 카스테라 하나에 식용유를 700밀리리터 사용하면 카스테라 가격을 맞출 수가 없다. 카스테라 값보다 식용유 값이 더 든다. 당연히 의심해야 했다. 물리학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식용유 700밀리리터를 써서 500그램짜리 빵이 나온다면 중학교 때 배운 질량보존의 법칙은 갖다 버려야 한다! 실제로는 700밀리리터는 대왕 카스테라 1개가 아니라 20개에 들어간 양이다. 한 개당 35밀리리터가 들어갔을 뿐이다. 
 
내가 어릴 때는 친구들과 말싸움하다가 "텔레비전에서 봤다니까"라고 말하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런 시대가 다시 와야 하지 않겠는가!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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