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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해치지 않아’, 21세기 ‘퍼펙트’ 이솝우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지금의 현실 ‘비틀기’
상식 밖의 설정, ‘말도 안 되는’ 시작…‘말이 될 것도 같은’ 결말
2020-01-06 00:00:00 2020-01-06 00: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기대감은 사실 딱 한 가지다. 연출을 맡은 손재곤 감독의 작법이었다. 2006달콤, 살벌한 연인그리고 2010이층의 악당을 선보였던 연출자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상황적 아이러니가 만들어 낸 코미디의 유쾌함과 인간미를 착한 시선으로 풀어낸 바 있다. 손 감독은 전혀 말도 안 되는상황을 말이 될 수도 있겠다싶은 상황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낸 충무로에선 보기 드문 연출자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해치지 않아 10년 만에 연출자로 복귀한 손 감독이기에 기대감은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흥미롭고 또 재미있고 또 손재곤스럽다로 정의가 된다.
 
 
 
원작을 전혀 모른단 전제에서 출발한다. 동물원이 있다. 이 동물원에는 사자도 있고, 북극곰도 있고, 고릴라도 있다. 나무늘보도 있다. 기린도 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이 모두 가짜다. 사람이 탈을 뒤집어 쓰고 동물인척연기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동물원에 방문한 관람객들은 속는다. 속아 주는 게 아니라 진짜 속는다. 이 동물원은 삽시간에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으며 관람객이 폭발한다. 폐업 직전의 동산 파크는 그렇게 되살아 난다.
 
이 말도 안 되는 발상을 실행에 옮긴 인물은 태수(안재홍). 국내 최고의 로펌 수습 변호사다. 멋들어진 짜 변호사가 아니다. 자리 하나 얻기 위해 온갖 수모와 면박을 견디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그에게 떨어지는 일은 겨우 허드렛일. 멱살을 잡히고 무시를 당하고 쥐어 터지고. 고단한 취준생보다 못한 변호사 생활이다. 수습 딱지 떼는 게 일생의 목표일 뿐이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그런 태수에게 일생 일대의 기회가 온다. M&A 전문 변호사로 성공하고 싶던 태수에게 로펌 대표가 제안을 한다. 망해가는 동물원 동산파크를 되살리라는 미션을 부여 받는다. 로펌과 깊은 연관이 있는 외국계 사모펀드가 이 동물원을 인수했다. 동물원을 되살려 프리미엄을 얹은 뒤 되팔아 이익을 챙겨야 하는 로펌 대표다. 사실 이 동물원을 인수한 외국계 사모펀드는 로펌 대표의 비자금 관리 페이퍼 컴퍼니다. 로펌 대표는 누구도 손대기 싫어하는 이 일의 적임자로 태수를 지목한다. 태수는 불가능한 미션을 기회로 여기고 성공시켜야 한다. 지방대 출신의 변호사로서 줄도 없고 빽도 없는 태수에겐 기회다.
 
부푼 꿈을 안고 동물원에 도착한다. 동산파크의 새로운 동물원장으로 취임한 태수다. 하지만 동물원에 동물이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동물 기린이 팔려가는 걸 목격한다. 빚에 허덕이던 동산파크는 동물을 하나 둘 팔아 연명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동물은 난폭한 북극곰 검은코한 마리뿐. 태수는 낙담한다. 되살릴 방법이 없다. 동물원에 동물이 없다. 관람객을 끌어 들일 방법이 없다. 결국 태수는 동물원 직원 소원(강소라), 박원장(박영규), 건욱(김성오), 해경(전여빈)과 함께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한다. 동물 탈을 쓰고 직원들이 동물 행세를 하자는 것. ‘말도 안된다는 직원들의 반대가 거세다. 하지만 동물원에 당연히 동물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는 태수의 설득은 의외로 이들을 설득한다. ‘말도 안 된다는 시작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뒤바뀌어지는 순간이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진짜 저럴 수도 있겠다싶은 순간이 됐다. 이제 동물원이 개장을 한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해치지 않아는 상식이다. 이 상식에 대한 역발상을 메시지로 담고 있다. 분명히 이건 가짜다. 영화 자체가 가짜다. 이 영화 속 동물원이 가짜다. 모두가 가짜다. 하지만 모두가 진짜라고 믿는다. 그 순간부터 가짜는 진짜가 된다. 상식이 역행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 진다. 이젠 가짜도 없고, 진짜도 없다.
 
영화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데로 믿고 싶게 만드는 우리 현실의 어그러진 이치를 상당히 능숙하게 담아냈다. ‘북극곰이 콜라를 마시는광고의 한 장면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선 이 한 장면으로 인해 모두가 가짜를 진짜로 믿어 버린다. 우린 북극곰을 보는 게 아니라 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 주체가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때문에 관람객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 자체로 재단을 하고 동산파크에 발을 딛는다. 이 곳에서 보고 싶은 것은 진짜 같은 가짜일 수도 있고, ‘가짜이지만 진짜라고 믿고 싶은 순간을 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달콤, 살벌한 연인그리고 이층의 악당두 편을 통해 상식으로 불리는 선입견에 대한 논리를 완벽하게 무너트리며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낸 손재곤 감독의 연출 방식은 해치지 않아에선 더욱 상승하고 더욱 깊어진다. 악인으로 등장하는 로펌 황대표도, 재벌가 포스를 물씬 풍기는 민상무도, 동산파크의 기상천외한 행각을 가능하게 만든 탈 제작 전문가 고대표도, 해경의 밉상 남친 성민조차도 역설적으로 어리바리하게 만들어버린 방식의 선택이 손 감독의 시선이고 방식 같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말이 되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상식과 비상식의 교집합도, 경계의 해체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완벽한 우화다.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고, 보고 싶은 것에서 사실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이 영화는 딱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 ‘제대로가 아닌 똑바로다’. 1 15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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