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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성이 핵심인 주민자치? 현장에선 관 주도로 '답답'
충남 농촌형 주민자치회 고도화 정책토론회서 문제 지적
2020-06-10 18:52:05 2020-06-10 18:52:05
[뉴스토마토 김종연 기자] "자발성이 핵심인 주민자치마저 정부 정책으로 추진된다면 진정한 주민자치는 요원해질 것입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관 주도의 주민자치 모델 개발이 아니라, 주민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치를 해 나갈 수 있는 법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지난 8일, 충남 청양복지타운 강당에서는 ‘충남 농촌형 주민자치회 고도화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를 지켜본 한 주민자치 전문가는 "'사상누각'이 떠올랐다. 주민자치가 '정책융복합'이나 '주민자치형 공공서비스'와 같은 화려한 단어로 치장됐지만 실상은 허술한 법적 토대 위에 임기응변식 정책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더구나 '관'이 주도하는 주민자치가 어떻게 일선 주민들에게 가 닿을 수 있겠느냐"고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했다.
 
충남 농촌형 주민자치와 정책 융복합을 위한 연구모임(대표 김명숙, 충남도의원)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는 지역 사례를 통해 '농촌형 주민자치' 모델을 개발하고 관련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다. 하지만 행정안전부와 지방지차단체가 제시한 ‘주민자치 청사진’과 달리 일선 현장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충남 농촌형 주민자치회 고도화를 위한 정책토론회. 왼쪽부터 김종수 천안시 병천면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 추진위원장, 이병도 마산면 주민자치회장, 최병국 홍산면 주민자치 사무국장, 송윤섭 지역발전위원.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시행착오 막는 행정기관"
 
'자치와 협동의 지역공동체 안남면 사례 발표'에 나선 송윤섭 옥천군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은 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의 문제를 짚었다. 송 위원은 "태생적으로 관이 주도해 설립된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회로 전환된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주민자치회로 전환되고 보니,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업무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도록 제약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민들이 자치의 필요성을 느끼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하는 과정을 경험해야 하는데, 행정기관이 그런 과정 자체를 앗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주민들이 자발적 참여로 성취감을 느낄 때 비로소 공동체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송 위원은 "주민들이 정책을 제안했을 때 즉각 반영되고 진척되어야 함에도 재정적인 문제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재정적 제한으로 일을 할 수 없다면 기존 주민자치위원회의 선례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재정적 문제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예산권 없어 사업 제자리…사무국 운영만도 빠듯"
 
김종수 천안시 병천면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 추진위원장도 예산 문제를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병천면 마을 사업을 통한 마을교육공동체의 희망' 발제에서 "주민들이 1년 6개월 넘게 논의해 온 병천면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에 현재까지도 예산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역 청년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자체 수익 창출 방안을 논의하는데 행정은 제자리걸음이다. 이렇다보니 예비계획 단계에서 보여준 주민들의 주체적 의지는 낮아지고 참여도는 떨어지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병도 서천군 마산면 주민자치위원장 역시 "주민자치회로 전환하면 첫 해에 5000만원, 2~3년차에 3000만 원 가량의 예산이 지원된다. 하지만 사무국 운영비를 제외하면 자체 사업비는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라며 "군이나 도에서 주민참여 예산을 신청하라는 공문이 오긴 하지만 대부분 농촌지역의 정체성이나 철학과 맞지 않는 것 같아 갈등하게 된다. 결국 예산에 맞춰 사업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주민이 행정기관과 컨설팅 업체 들러리"
 
주민자치를 가로막는 '옥상옥' 제도도 거론됐다. 충청남도가 주민참여 혁신모델로 내세우고 있는 '주민자치회 컨설팅'과 '임기제공무원 채용' 등이 오히려 주민자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종수 천안시 병천면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 추진위원장은 "지역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주민은 그저 컨설팅 업체와 행정기관가 회의하고 합의하는 과정에 배석하는 존재 정도로 여겨진다. 이게 과연 주민자치냐"면서 "행정에서 주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 단계부터 역량을 키워나가는 일에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주민자치회 전환 과정을 밀착 지원한다는 취지로 운영되는 '주민자치회 컨설팅'도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이병도 서천군 마산면 주민자치회장은 "자치회로 전환되면서 컨설팅 업체에서 몇 시간 정도 지정된 교육을 해주는데, 그것만으로 역량의 문제가 극복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환 후 교육'에서 '교육 후 전환'으로 바뀌어야 한다. 역량교육을 충분히 실시한 후 주민자치회로 전환하고, 그런 다음 컨설팅을 통해 지역에 맞는 주민자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주민자치 지원센터? 오히려 주민배제 우려"
 
'지원'을 명분으로 중간조직을 두는 방식도 주민자치를 가로막는 제도로 손꼽혔다. 청양군은 2019년 5월 민간 전문가를 임기제 공무원으로 채용해 '마을만들기 지원센터'의 센터장에 임명했다. 사업의 연속성·전문성을 높이고 행정과 민간 사이의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마을만들기 지원센터'를 두고, 임기제 공무원이 이를 운영토록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청양군은 마을만들기 지원센터에 푸드플랜지원센터, 도시재생지원센터, 주민자치영역 등의 중간지원조직을 연계·통합해 재단법인을 설립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미 서울시의 자치지원관 제도가 '주민관치화', '예산낭비'라는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관 주도로 만들어진 지원센터가 오히려 주민을 배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임기응변 정책 아닌 법률적 토대 마련 시급"
 
이날 제기된 현장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책적 임기응변이 아닌 주민자치를 위한 확실한 법률적 토대가 구축이 중론으로 나왔다. 최병국 부여군 홍산면 주민자치회 사무국장은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자치회로 전환하면서 행정안전부가 제안한 표준조례안에 근거해 조례를 만들고 규약도 만들었는데, 부여군이나 충청남도에서 조례가 통과되지 않아 실제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주민자치가 지속적이고 실질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법안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도 법과 제도 보완을 약속했다. '자치분권 방향과 주민자치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노계향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전문위원은 "문재인정부가 지향하는 자치분권의 최종 지향점은 주민주권 구현"이라며 "주민이 지역사회의 주인으로 주요 정책과 사업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실질적 역할과 권한을 부여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주민주권 구현이 법적 기반 하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지방자치법 개정 등 관련 법과 제도의 정비와 보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한편, 주민자치 실질화를 위한 입법화 염원에도 불구하고 법률안은 제20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앞서 정부가 마련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은 2019년 3월, 한국주민자치중앙회가 성안한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대표발의 이학재 의원)'은 올해 1월 국회에 발의됐으나 심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된 바 있다.
 
청양=김종연 기자 kimstomat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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