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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4화)스승을 기리다
2020-09-07 06:00:00 2020-09-07 06: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스승과 제자들
 
1994년 9월 초 나는 철학부 외국학생부서의 담당자인 베얄라 빠빌로브나를 찾아갔다. 러시아에서는 상대방을 존칭으로 부를 때 이름과 부칭(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외국인 학생들에게 늘 따뜻했던 그분의 이름과 부칭은 기억나는데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 “맑스주의 철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수업이 있을까요?” 자본주의로의 개혁과 개방이 물결치고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했다는 외침이 분분하던 시기에, 나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법한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빅토르 알렉세예비치의 수업이지요! 그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며칠 후 같은 기숙사 건물이라 가끔 마주쳤던 그리스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베얄라 빠빌로브나한테서 들었어요! 빅토르 알렉세예비치의 수업을 듣는다면서요?” ‘부자 나라’ 한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고백한 그는 기쁜 표정으로 자신이 겪은 스승의 인품과 학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장 존경하는 스승과의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사실, 그해 여름방학 때 한국에서 만난 동창생이 이미 내게 ‘바추린’ 교수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1992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그의 인터뷰가 1993년 독일 저널에 실리고 그것이 다시 1994년 7월 <진보평론>에 한국어로 번역됐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친구가 물어본 학자와 바쥴린 선생님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좀 지나서야 깨달았다. 
 
1996년 5월 1일 노동절 시위에 참가한 모스크바 국립대 철학부 바쥴린 교수(V. A. Vajulin, 1932~2012)와 제자 레나가 대화하고 있다. 그 뒤로 시위대의 '기생충 반대!'라는 슬로건이 일부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1992년, 그가 30년 동안 근무했던 철학부의 맑스-레닌주의 철학사과가 폐지되고 윤리학과로 바뀌었다. 바쥴린 교수는 헤겔, 맑스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재사유와 더불어 인류의 역사 발전과정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수행해 사회이론과 변증법적 논리학, 학문의 방법론 분야에서 독창적인 방향을 건설했다. 90년대 초, 스승의 이론을 바탕으로 제자들은 ‘국제 역사-논리학파’를 만들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모두 선생님의 학과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친구 페리클리스는 역사학부였고 나는 철학부지만 미학과였기에 내용상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의 이론과 방법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나의 지도교수 역시 그를 몹시 존경해 내가 그와 논의하는 것을 적극 수용했다.
 
학교 주변의 흰 눈 쌓인 숲길에 서서 긴긴 대화를 나눌 때, 그는 헤매는 나의 러시아어 속에서 내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예리하게 포착해 내곤 했다. 그러나 그보다 감탄스러웠던 것은 개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주는 인내심이었다. 그는 심지어 전도를 위해 그의 집 문을 두드린 개신교 신자의 얘기를 다 들어주면서 한 시간 넘게 토론한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적 없이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조주의자가 아니어서 공산당 구세력으로부터 외면당했고 사상적 기반을 저버리지 않아 기회주의적 개혁론자들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는 누구도 ‘신성화’하지 않았고 열린 정신과 사고로 양극단의 세력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인연이 시작된 지 몇 달 후인 1994년 12월 15일 바쥴린 선생님과 제자들을 기숙사로 초대해 토론을 했다. 방이 좁아 제자들의 일부가 앵글에서 빠졌다. 사진/필자 제공
 
‘법륜’과 교감한 비판적 맑스주의 철학자 
 
2002년 9월경 모스크바를 방문해 바쥴린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뵀을 때 그는 녹내장으로 시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대화 도중 나는 당시 나의 관심 영역이었던 요가와 기(氣)에 대해 선생님이 이미 공부를 하셨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침·뜸과 약재, 고대 인도의 아유르베다 등 동양의학에 관련된 지식을 습득하고 나아가 불교 철학에도 관심을 보이신 것이다. 선생님의 건강 악화는 그의 호기심과 탐구력을 새로운 분야로 꾸준히 확대시켜 나갔다. 친구 스베따가 들려준 다음의 일화들은 매우 그다운 모습이었다.
 
의학 박사 V. S. 이브라기모바의 <지압>(1984). 바쥴린 선생님이 보시던 책이다. 사진/필자 제공
 
“2012년 1월 8일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인 2011년 여름, 빅토르 알렉세예비치는 ‘쑤쉬네보-2’에서 휴양 중이셨어.” 쑤쉬네보-2는 모스크바에서 약 140킬로미터 떨어진 블라디미르 주 뻬뚜쉰스키 지구에 위치한 휴양소다. 당시 모스크바 국립인쇄대학 소관이었는데, 그 대학에서 일하던 제자가 주선해 선생님이 머물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선생님은 지팡이 없이 걸었고 식당으로 가는 층계가 몇 갠지 기억하셨어. 자신이 있는 공간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렸고 빛과 어둠을 구분했는데, 식당 창문을 바라보며 ‘창문이 저쪽에 있다’고 하셨지. 그의 시선은 놀랍도록 명료했어.”
 
그 휴양소에는 한국에서 온 작가들이 만든 조각품들이 있었다. 스베따가 조각품을 묘사하면 선생님은 그걸 듣고 형상을 표상해 알아차리셨다고 했다. 안 보이는 상태의 그를 가장 끌어당겼다던, 그래서 그가 종종 찾곤 했다던 작품의 사진을 본 순간 놀라움이 일었다. 수레바퀴 모양의 작품이 내 눈에는 ‘법륜(法輪, 다르마 차크라)’, 즉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는 ‘법의 바퀴’로 보였기 때문이다(이 상징은 힌두교, 자이나교에서도 사용된다). “선생님은 이 작품의 중심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물으신 후 거기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때로는 측면에서, 그 조각품을 느끼셨는데, 일정 시간 서 있는 게 필요하다고 하셨어. 그곳의 조각품들 각각이 ‘치유 작용’을 한다고도 말씀하셨지. 각 조각품이 그에게 미치는 어떤 영향력을 느끼셨던 거야.” 
 
쑤쉬네보-2 휴양소에 설치된 한국 예술가의 조각품으로 법륜을 연상시킨다. 바퀴의 테는 나무로, 살은 쇠로 되어 있다. 사진/미샤 바쥴린(2017년)
 
자료를 찾아보니 2010년 7월 한국 예술가들의 작업 네 번째 시리즈인 ‘한국의 자연 미술’ 개막이 그 휴양소에서 있었다고 돼 있다. 친구들이 2017년 그곳을 방문해 찍은 사진에는 ‘법륜’과 더불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하르방도 보인다. 그 외에도 커다란 물고기 등 여러 작품들이 있었지만 목조각들이라 그때는 이미 나무가 노화되어 반쯤 부서진 상태였고 휴양소도 운영되지 않아 파손돼 있었다고 했다. 스베따는 바쥴린 선생님이 수레바퀴뿐만 아니라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의미도 알고 계셨다고 전했다. “뭔가 부족한 사람이 그 장승에게 다가가면 그것이 힘을 준다고 말씀하셨어.” 나는 그가 ‘법의 바퀴’ 옆에서, 그리고 장승 옆에서, 치유의 기운을 받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쑤쉬네보-2 휴양소에 설치된 한국 예술가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사진/미샤 바쥴린(2017년)
 
마지막 철학적 사유
 
러시아 친구들로부터 들은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철학자로서 끝까지 사유를 멈추지 않았고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의지를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선생님이 급하게 실려 간 병원은 몹시 상태가 안 좋았고 심지어 병실이 없어 화장실 근처 복도에 누워 계셔야 했다. 평소 시력을 잃은 스승을 위해 그가 요청하는 책을 낭독하고 그가 불러 주는 학술 글을 대신 받아 적던 한 제자는 병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을 말리기 위해 화장실로 가곤 했다. 좋은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조언했던 담당과의 과장이 하필 그때 경질된 것도, 연초의 휴일에 걸린 것도 불운한 일이었다.
 
스베따의 전언에 따르면, 선생님은 마지막이 다가올 무렵 꼬르네이 추꼽스키(1882~1969)가 어린이들을 위해 시로 쓴 동화 <아이볼리트>(1929)를 낭송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선한 의사들이 부족합니다.” “착한 의사 아이볼리트! / 그가 나무 아래에 앉아 있네.”로 시작되는 이 동화의 주인공 아이볼리트는 동물들을 치료하는 의사로, 선량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양한 짐승들이 찾아오고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아이볼리트를 상기한 것은 마지막 시기 그가 병원에서 겪은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환자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가 해 온 사유들의 어느 시점에서 뭔가 심각한 것인 듯 남긴 말씀이 있다고 스베따가 덧붙였다. “사람들에게 ‘공감’(empathy)이 매우 빈약하게 발달돼 있습니다.”
 
추꼽스키의 시로 된 동화 <아이볼리트>(1929)를 묘사한 우표 '아이볼리트'. 5가지 '동화' 우표 세트 중 하나이다. 러시아, 1993년.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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