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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7화)러시아 다차와 뚤라 방문기
2020-09-28 06:00:00 2020-10-12 15:29:27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모스크바 근교 소프리노에 위치한 친구 레나 가족의 다차. 레나의 어머니 라이사 찌호노브나가 정성껏 가꾼 모습이다. 사진/필자 제공
 
러시아와 소련의 별장 문화 ‘다차’
 
친구 레나의 다차를 방문하기로 했다. 앞서 ‘오두막 별장’, ‘주말농장’이라 언급한 적 있는, 텃밭을 가꾸는 소박한 소련식 별장이다. 여름 내내 그곳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레나가 가는 길에 식료품을 사는데, 프랑스의 대형 마트인 오샹이 아닌가! 모스크바의 변화가 체감되는 순간이다. 도로를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익숙한 조각상이 보인다. 소련 시절 최대의 영화제작소인 모스필름의 영화가 시작될 때 항상 등장하던 ‘노동자와 집단농장(콜호즈)원’의 모습이다. 이 기념비적 작품은 소련 조각가 베라 무히나가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 소련관에 전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당시 극찬을 받았다. 전시 후에 프랑스로 팔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조각상은 결국 조국으로 돌아왔다.
 
베데엔하(국민경제달성박람회) 북쪽 입구에 위치한 조각상 ‘노동자와 집단농장원’. 복원 당시 받침대가 첨가됐다. 주행 중에 촬영된 모습이라 선명하지가 않다. 사진/필자 제공
 
레나네 다차는 모스크바 근교의 소프리노라는 도시형 정착지에 있는데, 다차들이 모인 구역으로 들어가는 공동 출입문이 보인다. 도착하니 레나의 어머니가 우리를 반겨 주신다. 다차의 공사를 마무리 중인 니콜라이 씨와 세르게이 씨는 매년 여름 우크라이나에서 일을 하러 여기로 온다. 그들이 이 다차의 방들과 외부 욕실, 화장실을 모두 건설했다.
 
‘다차’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1844년 니콜라이 1세의 칙령에서지만, 그 기원은 18세기 초 표트르 1세가 귀족들에게 농장이 딸린 대저택을 하사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정 러시아 때의 별장은 놀고먹는 귀족들을 위한 수천 헥타르(1헥타르는 10,000제곱미터)의 부지와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는데, 농노해방령이 선포된 1861년 이후부터 혁명 전까지는 부유한 상인들이 별장을 소유하거나 귀족이 아닌 지식인들이 임차하는 등, 보다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됐다.
 
모스크바 근교 소프리노에 위치한 친구 레나 가족의 다차. 레나의 어머니 라이사 찌호노브나(오른쪽)가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필자 제공
 
소련 시절의 다차는 1930년대 중반 공산당원 노동자와 사무원을 위한 ‘집단 정원’ 형태로 등장했고 흐루쇼프 시기(1953~1964)에 대규모로 확산됐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겪고 있던 식량난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컸다. 흐루시초프 때는 작물 재배를 위한 땅만 받을 수 있었는데,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작은 집을 짓는 것이 허락됐다. “텃밭을 가꿀 수 있게 땅의 총면적은 600제곱미터로, 집의 크기는 길이와 폭이 각각 6미터씩(6x6)으로 제한됐지. 그 이하로는 가능해도 그 이상은 안 됐어.” 레나의 어머니 라이사 찌호노브나가 말했다. 
 
국가로부터 부지를 받아 텃밭을 가꾸면서 직접 다차를 지어 나가는 과정은 여러 해에 걸쳐 이뤄졌다. 예를 들어, 레나네 다차는 1980년경 땅을 받아 소련 시절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집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을 못하고 돌아가신 후 이제야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다차 안채에는 러시아 정교의 성상화(이콘)들이 걸려 있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한평생 성실히 살아온 레나의 어머니도 역시 정교 문화의 영향 속에 계신 듯하다. 다차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19세기와 1920년대에 제조된 사모바르(러시아의 전통 주전자)들이다. 가족에게 내려오던 사모바르들은 10년 전에 불탔고 이 둘은 레나가 몇 해 전에 구입한 것들인데, 석탄이나 나무 조각으로 사모바르 안을 데우기 때문에 ‘석탄 사모바르’라고 불린다. 19세기 사모바르(단, 밸브 부분은 원형이 아닌 소련 시절의 것)에는 메달 인장이 10개나 찍혀 있고 그중 하나에 ‘1891년 중앙아시아 박람회’라고 쓰여 있다.
 
오른쪽의 19세기(단, 밸브는 소련 시절 제품) 사모바르와 왼쪽의 1920년대 사모바르는 '석탄 사모바르'라 불린다. 가운데 것은 평범한 전기 사모바르이다. 사진/필자 제공
 
21세기 러시아에는 신흥 부자들의 호화로운 다차들도 등장하고 있지만, 소련 시절의 소박한 텃밭 별장 문화는 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여전히 소중한 전통이자 현재 진행형이다. 러시아인들이 배고픈 90년대를 견뎌 낼 수 있었던 데는 다차의 덕분이 컸고 길거리 시장에서 내가 샀던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맛있는 유기농 사과들도 다차에서 길러 가져온 것들이었다.
 
레나의 어머니 라이사 찌호노브나가 바베큐를 만들기 위해 불을 피우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영웅 도시’ 뚤라와 장갑 열차
 
다차에서 돌아온 다음날 뚤라로 향했다. 뚤라는 보통 여행객들이 톨스토이의 생가가 있는 야쓰나야 빨랴나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이지만, 사실 그 자체가 유서 깊고 매력적인 도시다. 이견은 있지만 문헌에 따라 뚤라의 역사적 시초를 12세기로 보기도 하는데, 실질적인 도시 형성은 14세기로 추정되고 모스크바 공국의 소유가 된 것은 1503년이다. 뚤라 역에 내리면 제일 먼저 ‘영웅 도시’라는 글씨와 기념비들이 눈에 띈다. 대조국전쟁(1941~1945) 당시 독일군에 대항해 영웅적인 방어를 해낸 소비에트 연방의 13개 도시가 이 칭호를 받았는데, 뚤라가 그중 하나다.
 
뚤라의 기차역(모스크바 방향이라 '모스크바 역'이다)에 전시된 장갑 열차 13호 ‘뚤라 노동자’, 일명 ‘뚤랴크’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기차역에는 장갑 열차 13호 ‘뚤라 노동자’, 일명 ‘뚤랴크’(뚤라 주민)가 전시돼 있다. 설명을 읽어 보니, 이 장갑 열차는 1941년 10월 28일에 완성됐는데, 그때부터 1942년 6월 8일까지 뚤라와 다른 지역에서 용맹스러운 전투를 하고 상처투성이가 돼 고향 뚤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2015년 전승 70주년을 맞아 뚤랴크는 원형대로 복원됐다. 그런데 열차 칸들의 명칭이 인상적이다. 본부 차량, 빵을 만들던 제빵 차량 그리고 클럽 차량이 보인다. 클럽 칸은 장갑 열차 승무원들의 여가와 당·정치 업무를 위한 공간이었다. 고생했던 과거나 뚤랴크라는 이름이나 모두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차다.
 
톨스토이 애호가들과 도서관 이야기
 
기차역에는 선배 언니가 소개해 준 올가 베데네예바 선생님이 마중 나와 있다. 그녀는 역사학 전공자로,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현재 ‘야쓰나야 빨랴나 목요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이 문학 클럽은 톨스토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1978년 뚤라의 톨스토이 시립중앙도서관에서 도서관 관장 마카로바와 뚤라 국립교육대 문학 교수 그리네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목요회는 야쓰나야 빨랴나의 톨스토이 생가(영지·저택) 박물관과도 협력 관계를 맺고 다양한 행사를 주최한다.
 
뚤라 토박이인 올가 선생님 덕분에 이 고장의 역사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었다. 1712년 표트르 1세의 칙령에 따라 최초의 무기 공장이 뚤라에 세워진 이래, 이 도시는 무기 생산의 중심지였다. 뚤라는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는 데도 큰 기여를 했고, 2차 대전 때는 노동자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 도시를 대표하는 세 가지는 무기, 사모바르, 쁘랴닉(향신료 당밀빵)이고 각각의 박물관이 있다. 올가 선생님의 다음 말은 뚤라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뚤라에 알렉산드르 2세가 온 것을 기념해 알렉산드르 2세의 집이 세워졌어요. 혁명 후에는 칼 맑스의 집으로 불리다가 레닌 뚤라주립도서관이 됐고 도서관 건물이 별도로 세워진 후에는 사모바르 박물관이 됐지요.”
 
도심에 세워져 있는 뚤라의 명물 쁘랴닉(향신료 당밀빵) 기념비. '행복을 위해. 뚤라의 쁘랴닉은 1685년부터 유명하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왼쪽은 우스펜스키 성당. 사진/필자 제공
 
시내를 산책한 후 올가 선생님이 안내한 곳은 야쓰나야 빨랴나 목요회의 공동 회장이 근무하는 시립문화기관 ‘뚤라 도서관 시스템’이다. ‘도서관 및 정보 콤플렉스’라고도 불리는데, 도서관에 관계된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곳이라 볼 수 있다. 이곳의 관장인 올가 깔리니나 씨가 야쓰나야 빨랴나 목요회의 공동 회장이다. “뚤라 시와 뚤라 주의 레닌 군에 총 27개의 도서관이 있어요. 도서관 및 정보 콤플렉스는 구조적인 하위 단위지요.” 27개의 도서관들 중 3번 도서관은 톨스토이가 어린이들에게 자기 책들을 기증한 곳이다. 
 
깔리니나 씨의 안내를 받으며 열람실과 서가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톨스토이의 향기가 배어 있다. “매년 5월 27일은 전러시아 도서관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날 도시 전체의 도서관들을 대상으로 직업(전문)적인 경연대회를 개최합니다. 올해(2019년)가 5년째인데 우리 콤플렉스도 그동안 여러 상을 탔지요.” 조용하고 겸손한 어조지만 그녀의 자부심과 보람이 느껴진다. 문득 상기했다. 우리도 있다, 도서관의 날. 매년 4월 12일.
 
올가 베데네예바 선생님과 뚤라 도서관 시스템 관장 올가 깔리니나 씨가 관장실에서 야쓰나야 빨랴나 목요회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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