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의 피고인이 1심의 불리한 판결을 뒤집기 위해 항소심에서 기존 진술을 뒤집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의 강압이 있었다든지, 착오에 의한 진술이었다며 뒤집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기업 총수가 진술 번복.."피고인의 정당한 방어권"
형사사건을 많이 다뤄온 한 변호사는 "본인의 진술을, 그것도 기업 형사사건의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은 대기업 총수 형제가 전면적으로 번복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우선 최태원 회장 형제의 진술 번복에 대해 위증죄가 성립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위증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기업형사사건 전문인 또 다른 변호사는 "피고인들이 항소심에서 진술을 바꾸는 것을 위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의 죄에 대해 진실만을 강요하게 되는 셈인데 이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측면에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 형제의 진술번복에 대해서도 이 변호사는 비슷하게 해석했다.
그는 "피고인들이 항소심에서 진술을 바꾼건 흔한 일"이라며 "최 회장이 대기업 회장이라고 해서 자신의 이익이 될 '방어권 보장' 권리를 사용하지 말라고 누가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피고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한 전략인 만큼, 재판부도 이를 특별하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왜 항소심에서 갑자기 전략을 바꿨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최 회장 형제는 '형만 탈출'한다는 전략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제의 '동반 탈출'로 전략을 바꿨다.
이에 대해서는 변경된 변호인단의 전략적 수정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 회장 형제는 항소심을 앞두고 1심에서 자신들을 변호했던 김앤장 변호인단을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들로 전격 교체했다.
앞서 1심 재판부가 최 회장을 450억원의 횡령의 주범으로 판단해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한 반면, 최 부회장에겐 무죄를 선고하자 최 회장 형제는 물론 SK그룹 전체가 휘청였다. 재계에 대한 사법부의 본격적인 엄단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 만큼 기존 진술을 번복해 최 회장의 양형을 줄여보자는 전략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진술번복, 즉 거짓진술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방법이지만, 이에 대한 위증죄 성립 여부 문제는 새 변호인단이 이미 검토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펀드 조성자가 인출자는 아니다..불가피한 거짓말"
진술번복 내용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펀드 출자금 조성에 관여했지만 인출 및 송금과는 무관하다'는 게 최 회장의 주장이다.
자신은 '펀드 출자 조성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며 동생인 최 부회장만을 탓했던 1심에서의 주장보다는 공소사실을 일부 인정하는 선으로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은 이같은 '뒤바뀐 진술'은 실제로는 최 회장의 '억울함'을 부각하는 방어 전략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최 회장의 변호인측은 "인출자는 제3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여기에서의 제3자는 김원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자금 조성자와 인출자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동시에 김씨의 혐의를 집중시킴으로써 최 회장을 공소사실과 무관하게 만들었다"고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 회장 측은 지난 8일 항소심 첫 공판에서 김씨가 펀드 자금 인출로 실질적 이득을 본 '장본인'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의 변호인은 "재산 범죄의 동기는 경제적 이익을 취득하는게 목적이다. 450억을 최 회장이 횡령했다면, 불과 1~2개월 사용한 3억원 상당의 이자만큼의 이익을 가졌을 뿐이다. 이 같은 일이 밝혀지면 기업운영에 큰 타격을 줄 위험 부담을 안고도, 국내 3위 안에 꼽히는 대기업 회장이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며 최 회장의 무죄를 주장했다.
최 부회장도 1심에서 자신이 인정한 혐의사실을 번복하면서 이 같은 최 회장의 진술을 뒷받침했다.
1심에서 '형 몰래 '펀드 출자' 등을 혼자서 했다'고 진술했던 최 부회장은 항소심 법정에서 "펀드 자금 450억원을 일시적으로 잠시 쓰고 상환한 정도면 법적 책임이 낮을 것으로 판단해 (형의) '방어막'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 방어막이 최 회장에게 독으로 작용해 원심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즉 원심 재판부는 최 회장 형제의 유무죄만 판단하다 보니, 횡령의 주체가 제3자인 김씨일 가능성은 보지 못했다는 설명으로, 김씨의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든 것이다.
그동안 검찰은 줄곧 "최 회장과 최 부회장이 공범이기 때문에 이 중 한 사람만 책임지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최 부회장만 자백을 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해왔었다.
◇김원홍에게 떠넘기기?..당황한 검찰
검찰은 항소심에서 최 회장이 기존 진술을 뒤바꾸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검찰은 1심 때 무죄로 판단된 최 회장의 '성과금 추가 지급' 혐의, 최 부회장이 '펀드자금 조성'에 관여했음을 입증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최 회장 측의 역공으로 그동안 공들였던 전략이 무위가 된 셈이다.
검찰은 이날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1심 재판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결백하다고 주장했던 진술을 항소심에 이르러 특별한 사정 없이 '거짓말 이었다'고 태도를 변경한데 대해, 허탈한 심정을 주체할 수 없다"며 진술을 변경하게 된 계기를 신뢰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최 회장 형제의 새 전략에 따른 주범으로 급부상한 김씨에 대한 검찰의 대응도 만만치 않게 됐다.
검찰은 "'김준홍 베넥스 전 대표가 김원홍씨의 영향력에 의해 최 회장 형제를 기망해 SK그룹이 사활을 걸고 출자한 펀드 출자금을 임의로 사용했다'는 게 피고인이 항소심에서 들고 나온 전략적 사실관계인데, 이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질지 모르겠다. 과연 동시에 최 회장 형제를 기망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며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남은 항소심 재판의 쟁점은 과연 최 회장의 '책임 떠넘기기'인지, 혹은 방어권 행사를 위한 '필요적 거짓말'이었는지 여부로 옮겨졌다. 다음 공판기일은 오는 29일 오후 2시로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