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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 바람)컨테이너 구둣방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입력 : 2016-07-04 오전 6:00:00
학교 근처에 단골 구둣방이 있다. 인근에 구둣방이 여럿 있지만 신발이 망가질 때는 항상 그곳을 찾으니 방문 빈도에 상관없이 단골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한 평 남짓한 컨테이너에 “구두병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구둣방 안에는 입구에 본드가 엉겨 붙은 본드통과 구두약, 손때 묻은 솔들과 망치가 어지럽게 놓여있다.
 
구둣방 주인 할아버지는 낡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을 주름지고 거친 손에 쥐고 신발을 고쳐주신다. 신발을 고치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할아버지의 거친 손과 낡은 연장들이 망가진 신발을 고쳐가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컨테이너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전혀 다른 공간에 와있다는 느낌이 든다.
 
며칠 전 밑창 떨어진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오랜만에 구두병원을 찾았다. 신발을 고치던 할아버지는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취업준비를 위해 휴학했다는 나의 말을 듣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1975년에서 시작된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한 사람이 일해 네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던 그 시절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부유하고 강한, 한국에서보다 더 큰 돈을 모을 수 있는 ‘효율성의 나라’에서 더 나은 삶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도 고됐다. 가져간 돈으로 집을 구하고 나니 무일푼이 됐고, 할아버지는 부인과 함께 마트에 취직했다. 할아버지는 상품을 진열할 때는 “매일 빤스에 생선냄새 밸 때까지” 생선창고에서 박스를 옮겼고, 야간 캐셔로 일할 때는 “강도가 많아 사장들이 ‘목숨값’명목으로 허용하는 50불을 꿍쳐가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마트 하나를 인수했다.
 
주인 자리에 올랐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곳에선 혼자 벌어 네 식구를 먹여 살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식을 돌보느라 집에 남은 아내 몫까지 일해야 했고, ‘목숨값’이 드는 인건비도 아껴야 했다. 그때 할아버지의 하루는 34시간이었다. 7살, 12살 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트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었지만 대화 한 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4년을 살다 아들 녀석이 마약에 손을 대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4년 만에 찾은 한국은 많이 변해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효율성의 나라에서만 보였던 번쩍거리는 건물과 도로가 들어섰다. 그 동안 한국은 또 다른 효율성의 나라로 변해갔고 효율성은 경제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8년 뒤 할아버지가 한국에 돌아와 하던 비디오테이프 도매업이 망했고, 실직과 함께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기업에서 젊은 놈들 다 자르던 그 때” 환갑을 맞은 실직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실직 기간이 길어지자 선로에 몸을 던질 각오로 지하철 승강장에서 소주를 마시던 할아버지는 겁이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구두 고치는 일을 배웠다는 사실을 아는 후배가 구둣방을 하라고 조언했고, 1년만 하려던 것을 16년째 하고 있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자본주의적 효율성이 지배하는 컨테이너 바깥세상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세계가 보여주는 법칙은 간명했다. 마트의 야간 캐셔들에게 허용된 ‘목숨값’, 외환위기 당시 지하철에 투신하던 가장들,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 죽은 청년 하청 노동자.
 
효율성의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한 평짜리 컨테이너로 밀려났고, 효율성의 세계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던 구의역의 청년 노동자는 스크린도어 바깥으로 밀려났다. 할아버지의 컨테이너 구둣방엔 낡은 연장들이 있고, 구의역에서 죽은 청년 노동자의 가방에선 뜯지 못한 사발면 한 그릇이 유품으로 나왔다. 할아버지의 구둣방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너머는 같은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박예람 바람저널리스트(www.baram.news)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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