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3대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중 하나는 재벌 개혁이다. 재벌 개혁의 방안으로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은 경제민주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의 하위 항목으로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공약집에 언급했다. 그러나 스튜어드십 코드라는 이 영단어의 뜻을 단박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매체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의결권 행사 지침’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스튜어드십 코드의 본질은 단순한 의결권 행사 지침을 의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객을 위해 기관 투자자들이 가져야할 자세까지 포괄한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은 경제 민주화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열쇠다. 고객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기관들에게 명문화 된 지침으로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진짜 의미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이종오 국장은 “언론에서 잘못 쓰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의결권 행사 지침이란 의미 하나로만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의미를 완전히 축소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집사를 의미하는 단어 'Steward'의 원론적인 의미를 빌려와서, 기관 투자자들이 집안일을 담당하는 집사처럼 고객에게 책임을 다할 것을 주문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끝낸다. 혹은 기관 투자가들이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율적인 지침 정도로 설명한다. 사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포괄한다.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6년 12월 19일에 제정됐다. '기관 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골자로 7가지 항목으로 공표됐다. 원칙은 거창해보이지만 의미는 어렵지 않다. 기관 투자자들이 고객의 신탁을 맡아 관리하는 수탁자의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져야 하는지를 명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 등 기업에 주식을 투자하는 법인을 기관 투자자라고 한다. 연기금, 투자신탁회사 등도 기관 투자자에 포함된다. 기관 투자자는 고객의 돈을 받아 그 돈으로 투자를 한다. 그러니 기관 투자자들은 고객들의 신탁을 맡아 관리하는 수탁자이기도 한 것이다. 즉,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 투자자들이 투자하는 기업의 정책 결정에 일상적이고 전반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객의 신탁을 관리하는 수탁자로서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7원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의결권’에 대한 내용이 나온 것은 두 항목뿐이다. 5번째 항목인 ‘기관 투자자가 의결권 정책과 구체적인 내용, 사유를 함께 공개할 것’, 6번째 항목인 ‘기관 투자자는 의결권 행사와 책임 이행 활동에 대해 고객과 수익자에게 주기적으로 보고할 것’이 그렇다.
사실 나머지 항목들은 기관 투자자들은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명확하게 정책을 마련해 공개할 것, 투자대상회사를 주기적으로 점검할 것, 수탁자 책임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과 전문성을 갖출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기관 투자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에 투자하는 기관들에게 요구되는 행동 방식을 전반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문제와 함께 엮여 등장하는 것은 국민연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 경제 민주화를 위한 공약으로 국민연금을 안전하게 지키고,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있다. 국민연금은 말 그대로 연금에 가입한 국민이 납부하는 돈을 재원으로 한다. 그리고 수익을 내기 위해 이 돈을 여러 기업들에 투자한다. 이 지점에서 국민연금은 대기업들의 주식 지분을 보유하게 된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금호타이어 주식의 약 10%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모비스, SK, LG 등 국내 10대 대기업의 지분도 대거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의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니, 국민연금이 대기업들의 의사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전혀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2011년에 곽승준 당시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은 대기업을 견제할 대항마는 공적 연기금인데, 공적 연기금 중 하나인 국민 연금은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민연금이 신한금융의 2대 주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한금융 경영권 문제에서 전혀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2011년 곽 위원장의 지적 이후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보여준 입장도 대기업의 눈치를 본 사건으로 꼽힌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국민연금 측의 12명의 위원 중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진이 내는 안건에서 기관 투자자가 캐스팅 보트가 아니라 단순한 ‘거수기’로 이용된 것이다.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 운용장은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박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국민연금이 외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하는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은 국민 연금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향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할 것인지 아닌지가 다른 기관 투자자들의 참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2일 현재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를 확정지어 활용 중인 금융기관은 사모펀드(PEF) 3개로 (주)JKL파트너스, 이상파트너스, 스틱인베스트먼트이며,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겠다고 도입 예정 의사를 밝힌 기관은 자산운용사 7개, 증권사 2개, 자문사 2개 PEF 28개 등 39개다. 별도로 앞서 지난 2월 13일 금융위원회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주최로 열린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예정 기관 간담회’에서 자산운요사 3개, 자문사 1개 참여의향을 밝혔다.
사모펀드는 일반적으로 50인 이하의 투자자를 모집하여 운용하는 펀드다. 문제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예정 기관에 사모펀드가 편중되어 있는 것이다. 사모펀드의 경우는 소수의 투자자를 모으기 때문에 자본 시장에 영향을 주기가 자산운용사보다 상대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스튜어드십 코드의 전반적인 도입을 실현하기 위해선 자본 운용 규모가 큰 기관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 국민연금의 경우 현재 100조원이 넘는 돈을 증시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과 같은 큰 기관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 의사를 밝힌다면, 눈치를 보고 있던 나머지 기관들이 뒤따라 동참할 가능성이 커진다. 내년 정기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가 관건이다.
왜 기관들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꺼리나
왜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 투자자들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즉각 도입하지 않는 것일까. KoSIF는 원인 중 하나로 현재의 자본 시장법을 지목했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게 되면 일명 ‘5%룰’을 따라야 한다. ‘5%룰’은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기관 투자자가 지분의 1%포인트 이상을 거래하면, 영업일 5일 내에 그 거래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원래는 경영권에 의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행위나 주식을 투기하는 경우를 가려내기 위해 만든 룰이었다. 그러나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기업에게는 경영권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를 할 때마다 5일 이내에 시장에서 매매하는 종목의 내용을 계속 밝힐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법이 됐다. 기관 투자자 내부의 자산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기관 투자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8일 금융위원회에서 발간한 스튜어드십 코드 법령 해석집에 따르면 이 5%룰은 곧 완화될 예정이다. 몇몇 활동들은 경영 참여가 아닌 것으로 인정하고 5%룰을 적용받지 않게 된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해서 생길 것으로 예상되는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뜻이다.
변화는 시작됐다
지난 4월 11일 KoSIF가 개최한 대선 관련 정책 토론회에서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담은 축사 동영상을 보냈다. 축사에는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을 확보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이런 결심은 새로운 청와대 내각을 구성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임명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 저격수’로 불리던 사람이다.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 교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모두 참여연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김상조 공정위장은 참여연대에서 재벌개혁 감시단장을, 장하성 정책실장은 경제민주화위원장을 각각 맡았던 이력이 있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 대기업을 견제할 전문가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내년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가 걸려있지만, 긍정적인 선례는 있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일본의 경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후 계속 제자리였던 증시가 올랐다. 자국 내 연기금인 GPIF가 참여하면서 스튜어드십 코드도 자국에서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경제민주화의 앞날도 어둡지 않을 것이다. 내 돈을 맡아 관리해주는 기관이 투명하게 그 과정들을 공개하는 것, 그리고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만드는 것. 결국 기업이 사회적으로 책임을 지게끔 만드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경제 민주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다.
전진영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