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왕해나 기자] 전략실, 비서실, 기획실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각 그룹의 컨트롤타워가 사라지고 있다. 컨트롤타워는 많은 계열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의사결정 속도를 높여 경영환경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후 비선조직으로 취급받으며 비판의 대상이 된 데다 경영투명성과 독립경영 흐름이 거세지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오면서 더 이상 컨트롤타워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도 작용했다.
과거의 컨트롤타워가 오늘날 그룹의 입지를 만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총수의 메시지는 컨트롤타워에 의해 각 계열사에 퍼져 나갔다. 유망 사업을 육성할 때면 주요 인력과 자본을 컨트롤타워에 집중했다. 총수를 중심으로 급성장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1959년 만든 비서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건희 회장 체제이자 IMF 직후인 1998년에는 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2006년에는 전략기획실로 개편됐다가 2008년 삼성 특검으로 해체됐고 2010년 이건희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면서 미래전략실(미전실)로 부활했다. 이들 조직은 삼성이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선 밑거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제왕적 오너십은 리스크로 돌아왔다. 총수와 컨트롤타워는 이사회와 최고경영자(CEO)를 대신해 그룹 전반에 경영권을 행사했다. 의사결정은 불투명해졌고 그에 따른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총수에게 공백이 생기면 그룹의 경영시계는 멈췄다.
삼성이 지난 2017년 2월 미전실을 해체하면서 60년 가까이 이어 온 그룹 중심의 경영방식을 포기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미전실은 삼성의 정경유착을 관장한 비선 조직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삼성은 정경유착의 리스크를 해소한다는 취지하에 미전실을 폐지하고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각각 전자, 비전자, 금융 계열사를 관리하기로 했다.
삼성 외 다른 그룹들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크게 축소시키는 대신 개별 사업부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있다. 전문 경영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함으로써 계열사간 경쟁구도를 형성해 그룹 전체의 경쟁력을 개선하겠다는 전략이다. 신사업에 대해서는 TF팀을 가동해 사업 추진과 의사 결정에 기동성을 높이고 있다.
롯데는 2017년 2월부터 그룹 컨트롤타워인 정책본부의 기능과 인력을 대폭 줄였다. 정책본부 역시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비선 조직으로 지목된 터였다. 롯데그룹은 비서실·대외협력단·운영실·개선실·지원실·인사실·비전전략실 등 총 7개실로 운영하던 정책본부 조직을 유통과 식품, 화학, 호텔·서비스 등 4개 부문으로 축소했다. 대신 개별 사업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비즈니스유닛(BU) 체제를 도입했다. 한화 역시 지난해 6월 그룹 컨트롤타워였던 경영기획실과 그룹 경영자문기구인 경영조정위원회(경조위)를 해체하기로 했다. 경영기획실의 기능은 최상위 지배회사인 ㈜한화가 수행하게 됐다.
현대자동차는 그룹의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기획조정실을 운영 중이지만 정의선 수석부회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권한을 지속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SK는 파견인력으로 구성된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라는 컨트롤타워를 운영하고 있지만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가 각 위원장을 맡는 사업형 지주회사다. 일찌감치 지주회사로 전환한 LG는 ㈜LG가 계열사간 업무조정과 신사업 발굴 등의 업무를 도맡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선도기업을 추격하는 것으로는 성장이 가능하지 않으며 기존의 톱다운 방식으로는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대응하지 못 한다는 인식에서 기인했다. 3,4세로의 재계 세대교체가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환경에 익숙한 젊은 총수들이 크고 강한 조직보다는 작고 기민한 조직으로 대응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점도 변화에 속도가 붙는 이유다. 업계 전문가들은 더 이상 컨트롤타워에 의한 지휘와 통제가 아닌 유연함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그룹으로 변화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총수와 컨트롤타워는 대규모 투자, 대형 인수합병 등 그룹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협의하거나 결정을 하고 개별 사업부는 전문 경영인들이 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며 “4차 산업혁명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평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 자유로운 인재가 필수적이라는 이야기가 공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왕해나 기자 haena0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