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이변이었다. 아칸소주 주지사 출신인 빌 클린턴 후보는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인 부시 후보를 이기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부시 대통령은 침체된 미국 경제 문제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열세에 놓인 선거 판세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Economy.)'라는 유명한 캠페인으로 단숨에 뒤집게 된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클린턴 대통령에게 놓인 최대의 과제는 경제였다.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넘어간 미국 경제의 심폐소생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이론적 설명이나 해법보다 현실적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무엇보다 경제 정책을 총괄할 사람이 중요했다. 클린턴은 이론과 현실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현실이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로버트 루빈이 경제 정책 수장 자리에 올랐다. 임기 처음 2년 간은 백악관 경제 정책 보좌관으로, 그 이후 2년은 재무장관을 지냈다. 루빈의 경제 정책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현실 속에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하성 실장, 김수현 실장에 이어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김상조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카드를 빼들었다. 김상조 신임 정책실장은 시민단체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물이다. 대학교수이자 참여연대 재벌개혁 운동의 선봉에 선 활동가였다.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로 특히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의 문어발식 성장 모델에 제동을 걸었고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점을 파헤쳐 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진보 경제학자로서 자신을 역할을 십분 발휘해 온 셈이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듯 우리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사회 경제적 분배 관계의 꼭지점에서 혜택을 누려온 재벌에 대한 견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정치권력의 중심이 아닌 시민권익의 중심에서 노력을 다해온 대표적 인사가 김상조였다. 그렇지만 정부의 주요 인사가 되는 순간 국민들이 바라는 역할은 달라진다.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말 그대로 공정 거래의 중심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자리다. 대기업에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하고 대기업과 정부 사이에 부당한 상하 관계가 작동된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무조건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일방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정책 실장은 우리 경제를 더 넓게 현실적으로 봐야 하는 자리다. 왜냐하면 국민들의 현실 경제에 대한 여론이 심상치 않은 까닭이다.
김상조 정책실장의 최우선 과제는 정부의 경제 기조에 대한 방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변함없이 소득주도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 여론은 우리 경제 현실에 맞는 조정을 원하고 있다. 한국리서치가 한겨레의 의뢰를 받아 지난 5월 2~3일 실시한 조사(전국1000명 유무선RDD전화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 응답률14% 자세한 사항은 조사기관의 홈페이지에서 확인가능)에서 '가계의 임금과 소득을 늘려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소비를 촉진해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어본 결과 '정책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방법은 보완해야 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6명을 넘었다. 지금 형식과 내용대로 지지한다는 의견은 고작 15.6%에 그쳤다. 현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절반이 넘는 56.4%는 '정책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방법은 보완해야 한다'는 결과로 나타났다. '정책의 취지와 방법 모두 지지한다'는 응답은 20.4%에 불과했다. 조사 결과로 나타난 민심은 경제 정책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는 심리라고 한다. 지난해부터 경제 관련 국민들이 불안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인물 갈등설이었다. 청와대 정책 수장인 장하성 정책실장과 김동연 경제 부총리 사이 이른바 '김앤장' 충돌이 주목을 끌었다. 결국 두 사람은 물러났다. 실물 경제를 기준으로 해야 하는 홍남기 경제 부총리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남부러워하는 '경제 브로맨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김 정책실장이 이번 정부에 뛰어들기 전에 많은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시민활동가 김상조 교수를 두려워했던 이유가 있다. 살아있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였다.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도, 서슬 퍼런 정부의 입김도 그를 무너트리지 못했다. 공정거래위원장이라는 전문 영역이 아닌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상조의 운명은 정권에 순응하는 폴리페서가 아닌 살아있는 권력에 옳은 소리, 쓴 소리를 하는 강단이다. 기업의 주총 현장에서,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 칼끝이 무디진 않았던 김상조 실장의 바짝 선 날이 몸담고 있는 정부라고 해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매력적인 김상조 경제개혁 전도사의 모습은 바로 그 장면이기 때문이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insightkce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