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지난해 1월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태양의 섬을 여행하다 피살된 한인여성 살해 용의자에 대해 볼리비아 검찰이 DNA 검사에 착수했다. 체포 169일·구속 166일 만에 이뤄지는 DNA 검사 결과는 기소여부를 가릴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19일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14일(현지시각) 오전 10시께 볼리비아 검찰은 구속 상태로 수감 중인 로헤르 초케 멘도사(Roger Choque Mendoza)에 대해 DNA 검사를 위한 혈액 채취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 피해자 A씨의 시신에서 채취한 DNA가 초케의 것으로 확인되면 정식 기소할 예정이다. 다만 검찰이 공범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DNA가 불일치할 경우 초케는 바로 구속적부심을 신청해 풀려날 공산이 크다. 범인을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를 두고 모든 것을 건 주사위가 던져진 셈이다.
지난해 1월 볼리비아 태양의 섬에서 발생한 한인 관광객 피살 주범으로 지목된 로헤르 초케 멘도사(Roger Choque Mendoza)가 지난 4월30일(현지시각) 체포 후 이송돼 기자들 앞에 선 모습. 사진/볼리비아 내무부 홈페이지
체포 169일·구속 166일 만에 이뤄진 DNA 검사
태양의 섬 현지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차야(Challa)’족 부족장인 초케는 지난 4월30일 볼리비아 경찰에 체포됐다. 체포 직후 24시간 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했지만 ‘조사 당시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았다’는 초케 측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져 영장은 한 차례 기각됐다. 그러나 사건 발생 직후 내무부 고발로 1년여 간 용의선상에 오른 뒤 체포 직전까지 부족원들이 무력으로 저항하던 사정 등을 감안, 도주할 우려가 참작돼 마침내 지난 5월3일 구속됐다. 그는 현재 볼리비아 행정수도 라파스(La Paz)에 위치한 산페드로(San Pedro) 감옥에 구금돼있다. 한국식 구치소와 달리 안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가족과 거주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사회’와 같은 현지 최대 규모 수형시설이다.
초케는 DNA 검사 요구에 불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감옥 내에서도 도망 다녔고, 검사를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태양의 신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피검사 같은 걸 받을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며 유족이 선임한 피해자 변호사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초케는 변호인을 모두 해임한 상태라 변호사를 대동할 수 없어 피해자 변호사가 급히 피의자 변호인으로 설 지인 변호사를 섭외해 동석했다. 변호사를 대동해야 하는 형식적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다. 초케의 변호인이 자진 사임했는지 초케가 직접 해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통상 구속 상태에서 기소여부를 앞둔 피의자에게 변호인 조력이 절실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용 등 문제로 일단 사선 변호를 중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필요 시 국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한인여성 살해 용의자 '로헤르 초케(Roger Choque)' 체포 당시 영상(오른쪽)이 지난 5월3일(현지시각) 볼리비아 주요 방송사 'UNITEL' 아침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있다. 사진/UNITEL 보도 영상 갈무리
범인 잡을 유일한 단서에 ‘올인’…주사위는 던져졌다
DNA 검사는 현재로서 범인을 잡을 유일한 절차다. 지난해 1월9일 오전 호스텔 체크인 기록을 끝으로 11일 오후 시신으로 발견된 A씨의 몸에선 다수의 창상과 자상 외 성폭행 흔적이 발견됐다. 직접적 사인은 목 부위 치명적 창상에 의한 저혈성 쇼크로, 부검 당시 채취한 시료가 범인을 잡을 결정적 단서였다.
초케의 신병을 확보하고도 DNA 검사를 미룬 건 공범을 잡기 위해서였다. A씨 사건 관련 증언 등을 종합할 때 3~5명의 공범 내지 은닉범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초케가 살해 주범이며 2명의 공범이 있다’는 취지의 증언도 나왔다. 이에 A씨 아버지가 초케에 대한 형사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공범과 은닉범으로 언급된 이들을 함께 대상으로 적시하기도 했다. 검찰은 초케가 살해 주범일 뿐 성폭행은 공범이 저질렀을 가능성도 감안, 다른 용의자 신병도 확보해 한꺼번에 DNA 검사를 하기 위해 추가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원주민 자치 지역 거주자들의 신분을 확실히 특정하기 어렵고 태양의 섬 내 여론이 악화하면서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고 보고 예심 판사에게 초케의 단독 DNA 검사를 청구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로써 초케의 DNA 일치 여부는 범인을 잡을 사실상 마지막 기로점이 됐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주변 부족과, 같은 차야족 내 전언이 모두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초케는 현재까지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DNA 검사 결과 초케가 범인으로 확인되면 검찰은 그를 바로 기소해 재판에 넘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범과 은닉범 등 추가 수사까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그러나 공범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초케의 DNA가 불일치로 판명 날 경우 사실상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DNA가 일치할 가능성이 큰 다른 공범을 특정하기도, 체포하기도 어려워지면서 사건이 미제로 남을 여지도 있다.
지난 16일(현지시각) 볼리비아 엘알토에서 진행된 선거 유세 폐막 집회에 나온 좌파 여당 사회주의운동(MAS)의 대선 후보 에보 모랄레스 현 볼리비아 대통령 모습. 사진/뉴시스
원주민 표 의식한 총선정국 변수는 영향권 밖으로
당초 오는 20일 예정한 볼리비아 대선과 총선도 변수가 될 우려가 있었다. 4선에 도전하는 원주민 출신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과 여당이 원주민 표를 의식해 상황이 초케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초케는 체포 직후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부족장으로서 우리 마을의 규칙과 절차를 지킨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초케와 부족들은 중앙 사법 당국에 초케가 차야족 사법 처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현지 언론이 경찰의 체포 과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만큼 초케에 대한 볼리비아 사법부의 처분은 원주민 유권자들에게도 관심사다.
그러나 DNA 검사 결과가 선거 이후 나오는 데다 현재 선거 국면이 모랄레스 대통령과 여당의 압승으로 기울면서 선거정국으로 인한 변수도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볼리비아는 대통령과 부통령, 상·하원 국회의원 전원을 모두 같은 날 국민직접투표로 선출한다. 일단 의회를 구성하고 대통령만 결선 투표를 통해 최종 선출한다. 2020~2025년 임기의 이번 대통령 결선 투표일은 12월15일 예정이다. 현재로선 2006년부터 장기 집권해온 모랄레스 대통령의 4선이 유력하다.
무엇보다 DNA 검사 결과도 초케를 범인으로 지목할 땐 일부 원주민 여론의 반발도 돌파할 수 있다. 결국 모든 키는 유력 용의자 초케에 대한 이번 DNA 검사 결과에 달렸다.
신속한 검사가 관건…전문가들 “긴급 시 2~3일 내 가능”
볼리비아 DNA 검사 기간은 통상 3주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나 행정 처리 속도가 더뎌지면 2~3개월까지 늘어질 수 있다는 게 현지 법조계의 우려다. 다만 전문가들은 혈액 샘플과 시신에서 채취한 시료를 대조하는 DNA 검사 자체는 과학적으로 2일 만에도 결과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볼리비아 의료진은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검사 자체는 2일이면 모든 걸 알 수 있지만 형사사건의 경우 절차 등이 복잡해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관계자는 “국과수 감정절차규정상 처리기간은 주말과 휴일을 제외한 ‘15일’로, 특수 미제사건은 ‘60일’, 나머지 실종자 신원확인 등은 ‘30일’ 내 처리해야 한다”면서도 “경찰에서 긴급감정 사건으로 의뢰해 순서를 앞당길 경우 검사 자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2~3일 안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구속 피의자에 대한 검찰 수사기간은 통상 6개월이지만, 볼리비아 형사법상 초케와 같이 여성살해 등 강력범죄 피의자는 예외적으로 구속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볼리비아 인근 에콰도르와 칠레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중남미에서 활동 중인 하상욱 변호사는 “아동 강간 등 흉악범의 경우 피의자라 할지라도 유죄추정을 하는 게 현지 법 정서”라고 설명했다. 다만 확정판결 전까진 불구속 수사나 재판을 요구하는 구속적부심을 신청할 수 있다. 물론 검찰과 피해자 변호사가 이의를 제기해 저지할 수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아직 초케에 대한 구속적부심은 열린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볼리비아 현지 방송사 'PAT' 온라인 홈페이지에 지난 1일 오전(현지시각) 올라온 '한인 여성 살해 용의자 결백 주장' 제하 보도에서 살인 혐의를 받는 로헤르 초케 멘도사(Roger Choque Mendoza)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사진/PAT 영상 갈무리
지난해 1월 볼리비아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한인여성 조 모 씨의 용의자로 지목된 현지 원주민 부족장 '로헤르 초케'가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모습이 비영리단체 '미주통합을 위한 국제법률가연맹(RIJIA)' 홈페이지에 소개된 모습. 오른쪽은 지난 3월8일자 현지 언론에 보도된 체포영장 발부 사실과 신상 공개. 사진/홈페이지 및 언론 보도 갈무리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