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디지털 혁신'.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경자년(庚子年) 새해 공통적으로 꺼내든 키워드다. 미래에 대한 준비와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올해는 여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왔다.
당장의 먹거리 고민도 만만치 않은 데 성큼 다가온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한 준비도 서두르지 않으면 생사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는 기업의 사정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가 둔화하면서 작년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2%를 밑돌았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수출은 10% 넘게 줄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던 2009년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냈다. 경제와 시장이 안 좋은데 기업의 사정이 좋을 리 만무하다.
올해는 조금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경기가 하강 국면에 진입했고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올해 세계 경제는 글로벌 저성장 기조 고착화, 정치적 불확실성의 확대, 투자·수출에서 소비로의 침체 확산으로 더욱 어려워 질 것"이란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의 말이나 "시장 환경이 매우 불확실하고 대내외적 도전은 더욱 심화할 것"이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의 얘기를 구성원을 독려하기 위한 수사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이유다.
현대차그룹이 앞으로 5년간 100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것도 변화에 대한 절박함을 방증한다. 대규모 투자는 큰 열매가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큰 부담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서다.
허태수 GS 회장이 디지털·글로벌 역량을 갖춘 인재 확보·육성과 함께 조직 문화를 민첩한 일 처리가 가능한 '애자일(Agile)'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한 것을 비롯해 CEO들이 조직 문화 혁신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구광모 LG 회장이 "앉아서 검토만 하지 말고 일단 도전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미래 생존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 기업들이 처한 상황은 총체적 변화가 필요하지만 여유는 별로 없는 말 그대로의 위기다. 문제가 복잡하니 해법도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언제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구성원 간의 힘을 한데 모으는 협력과 화합이다. 반목과 갈등은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위기를 키우는 촉매가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조직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결실을 만들려는 시도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개인이나 일부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대다수가 피해를 보고 기업을 비롯한 조직과 공동체의 미래가 훼손되는 것도 곤란하다.
경자년의 자(子)는 12간지의 첫 번째로 자식과 번성을 뜻하고 만물의 씨앗이 잉태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산업계 구성원 모두가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 역량을 집중한다면 이번 경자년이 희망보다 더 큰 걱정으로 출발했지만 머지않아 미래 시장의 주도권을 쥔, 미래세대를 위한 토대를 닦은 원년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전보규 기자 jbk880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