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는 무력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서기) 1170년 이후 100년 동안은 무신 정권의 폭력 하에서 지식인들이 살아나가야 했고, 그 다음 무신정권이 끝날 즈음에 시작된 몽골의 침략부터 원나라 간섭기까지 동안은 고려는 유라시아에 걸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제국을 건설한 몽골이라는 막강한 물리력 앞에서 국가를 지키고 생존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려 왕조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려는 역성혁명 세력이라는 무력 앞에서, 지식인들은 자기 자존을 지키거나 자기 생각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를 이규보, 이제현, 정몽주 세 사람의 지식인의 삶을 예로 들어서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이규보는 무신정변이라는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무신정권 치하에서, 직접생산자들이 가장 중요하고 그들이 우리 공동체를 밑에서 떠받쳐주는 핵심세력임을, 강조하는 시편들을 통해서 무신정권의 포학(학정)에 대해서 비판하고, 이제현은 몽골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에 맞서서 고려가 원나라의 지방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논리적인 글을 통해서 지식인의 무기인 이성적인 글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한 정몽주 초상. 사진=뉴시스
정몽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고려는 불교사찰을 왕조가 후원하고, 왕조가 불교사찰의 가장 커다란 후원자이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폐단이 많이 생겨났고, 조세가 많이 걷히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기를 맞이해서 성리학(性理學)을 도입함으로써,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런 세력, 사람들을 ‘신흥 사대부’라고 불렀습니다. 신흥 사대부들은 두 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강경파들은 무력으로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성리학(性理學)에 기초한 나라를 새로 만들자는, ‘역성혁명(易姓革命)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성계, 이방원 부자와 정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건파들은 성리학(性理學)을 도입해서, 고려라는 왕조를 새롭게 혁신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로서, 정몽주, 이색 등을 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매일 모여서 유교 경전을 토론하고, 그 토론이 끝나지 않을 때는 밤을 새기까지 하면서도, 열심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개혁과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위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밤샘 토론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권근(權近)이 쓴 <이색행장(李穡行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색 선생에 대한 일대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그때 당시에 신흥 사대부들이 가졌던 모습을, 그때의 열정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그 열정 속에서 이들은 밤을 새워가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든가, 개혁을 통해서 고려를 새롭게 하기 위한 밤샘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역사에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정몽주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즉위 뒤의 초상화. 사진=필자 제공
‘역성혁명(易姓革命)파’였던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거목이 우리 편에 설 것인지, 고려왕조를 역성혁명에 의해서 타도하는 편에 설 것인지, 고려를 지키는 편에 설 것인지, 떠보기 위해서, 정몽주의 심중(心中)을 알아내기 위해서 학창시절에 많이 외웠던 <하여가(何如歌)>라는 시조를 정몽주에게 보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 만년 누리리라.“ 이것은 이방원이 잘못한 것입니다. 이방원이 100% 잘못한 것입니다. 이 문제가 고려 왕조를 지킬 것이냐 개혁할 것이냐,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고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거죠. 정신 나간 거예요.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이렇게 묻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여가>부터 잘못된 겁니다. <하여가>가 정몽주의 죽음을 낳은 거예요. <하여가>식으로 물으니까, 정몽주가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야 그게 말이 돼 인마? 그게 말이 돼? 아냐. 나는 거기에 안 따라.“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뭐 이러면 어때?“ 정몽주가 따를 수 없는 질문을 한 겁니다. 이방원은 왜 고려가 멸망해야 되는지, 우리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왜 고려를 타도하고, 새 왕조를 세워야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어야 돼요. 그래야지 대화가 되는 거죠. 발전이 있는 거고, 정몽주는 이방원이 그 따위로 질문을 하니까, 일편단심(一片丹心) 밖에는 내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첫 번째 잘못은 <하여가>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시조를 지은 것이고, 두 번째 잘못은 정몽주를 죽인 거예요. 정몽주를 자기 수하의 부하를 보내서 선죽교에서 때려죽입니다. 공양왕 4년(서기 1392년) 4월4일 이방원은 자신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1395)를 보내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다친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개성의 선죽교에서 철퇴로 쳐서 죽입니다. 때려죽이니까, 정몽주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가 없고, 정몽주가 조선시대 내내 충신의 대명사가 된 거예요.
고려가 민중한테 백성들한테 옳은 나라인지, 올바른 나라인지, 어떤 나라에 충성을 바쳐야 되는지를 검토할 기회를 이방원이 박탈한 겁니다. 정몽주처럼 망해가는 나라에, 백성들한테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는 정권한테, 충성을 바치는 게 옳은지를 제대로 토론해야 되는데, 이방원은 그 토론을 못한 거예요. 두 가지 잘못이에요. 하나는 <하여가>같이 말도 안 되는 시조를 지어서, 정당한 토론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두 번째는 정몽주를 그냥 때려죽임으로써, 정몽주 같은 맹목적인 충성에 대해서, 그냥 숭배하게 만든 거예요. 조선시대도 왕들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필요하거든요. 어떤 정권도 그래요. 어떤 권력도 로얄티(royalty, 충성)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정몽주를 무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조선시대 정몽주 후손들은 조금 잘못해도, 정몽주 후손이라는 이유로 벌을 안 받았어요. 처벌을 안 받았어요. 정몽주의 후손을 누가 건드려요. 연산군도 못 건드렸어요. 이게 기록에 다 남아있습니다. 이게 사실 이방원의 잘못이에요.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의 초점은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백주테러를 당해서 죽었죠. 지식인의 비참한 운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몽주를 칭찬할 것이 아니라, 이방원의 잘못을 저희들이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돼요.
정몽주가 이방원 부하에게 피살당한 북한 개성의 선죽교 표지석. 사진=필자 제공
<하여가>라는 질문부터가 틀렸고, 정공법을 써서 제대로 질문을 던져서 제대로 토론을 해야 돼요. 고려를 살려두는 게 맞느냐, 유지하는 게 맞느냐, 이거를 빨리 타도하고, 제대로 된 나라를 세워서 우리 공동체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게 맞느냐, 이런 토론을 했어야 된다고요. 그 다음에 정몽주를 때려죽일 게 아니라, 정몽주 네가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충성심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고려 왕조가 우리 공동체의 선택의 최선인가? 정몽주의 선택이 최선입니까? 정몽주는 충성의 상징이 될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고려 시대의 마지막 장면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의 장면 <하여가(何如歌)>와 <백골가(白骨歌)>가 불려지는 장면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드렸습니다.
선생님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겠는지, 이런 역사적 장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늘 닥쳐올 수 있습니다. 대선 때도 닥쳐올 수 있고, 다른 국가 교체기에도 닥쳐올 수 있죠. 이 사람 뽑는 게 옳겠느냐. 이 사람한테 충성을 바치는 게 옳겠느냐? 바로 갈아치우는 게 옳겠느냐, 이런 선택의 순간이 닥쳐올 때, 어떻게 움직여야 되느냐, <하여가>처럼 움직여서는 안 되고, 정몽주처럼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서도 안 되고, 그 사람들을 폭력으로 진압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끝까지 토론해서 논리를 남겨야 되는 거죠. 이제현처럼 명백한 논리로써 고려를 원나라에 귀속시키려고 하는 주장을 잠재울 수 있는, 그런 논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원도 ‘신진 사대부’로 불리지만, 이방원은 그런 논리를 제시하는 데 역부족이었고, <하여가>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정몽주를 떠보려 했지요. 정몽주의 논리는 뭐예요? 정몽주는 왜 고려를 지키려 했습니까? 고려를 지키려 했으니까 정몽주가 옳은 겁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죽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됐기 때문에, 희생자 프레임의 (영향을) 받아서, 정몽주가 옳은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동정심을 우리가 가지고 있거든요. 이건 잘못된 겁니다. 역사에서 이방원 식의 말도 안 되는 <하여가>를 넘어서야 되고, 정몽주처럼, 침묵하는 충성, 맹목적인 충성을 넘어서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우리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과제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