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예의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종 복위 운동이라는 사건입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이 운동에 이 운동을 주모한 성삼문, 박평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오늘날 ‘사육신’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했을 때, 단종에게서 무력으로 왕권을 뺏은 수양대군-세조는 이들을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오늘날의 광화문 거리)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당합니다.
《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 수양대군-세조는 오늘날의 광화문대로 옆의 서울신문사 자리로 추정되는 군기감(軍器監, 무기고) 앞길에, 문무 백관을 모아놓고 둘러서서 보게 한 뒤, 성삼문 등 사육신을 거열형(車裂刑)으로 처형합니다.
‘거열형’이란 죄수의 사지에다가 각각 소 달구지(또는 말)를 묶고 서로 다른 네 방향으로 달구지가 달리도록 몰아서 죄수의 몸을 찢어서 죽이는,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한 봉건적이고 야만적인 처형 방법입니다. 수레 대신 다섯 마리의 말을 묶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형벌을 ‘오마분시(五馬分尸)’라고도 부릅니다. 거열형은 봉건시대의 형벌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끔찍한 폭력적인 처형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육신역사공원 내에는 ‘사육신역사관’이 운영되고 있는데, 사육신묘역을 처음 만든 김시습에 대한 사항은 한 건도 없다. 사진=필자 제공
《세조실록》에는 ‘환’이라는 글자 한 글자로 사육신들에 대한 처형 방법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 때 나온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 글자를 찾아보면, “환이란 사람을 수레로 찢어죽이는 것[車裂人也]”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설문해자》라는 책이 한 나라 때 나온 책이므로, 한나라 이전에 거열형이 ‘환’이라고 표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열형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에 고안 되었습니다. 전국시대의 법가(法家)의 창시자로 불리는 상앙(서기전 390~338년)이 이 끔찍한 처형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해 내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상앙은 진(秦)나라에서 변법을 추진해 약소국이던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자신도 모함을 받아서 거열형에 처해집니다. 거열형을 처음 고안해낸 자가 거열형으로 처형당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의 부메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육신이 .거열형으로 처형 당한 곳은 《세조실록》 2년 6월조의 기사에 “군기감 앞길[軍器監前路]”이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당시 조선시대의 군기감(軍器監, 무기의 제작과 보수를 담당하는 관청)이 있던 자리는 오늘날 광화문의 서울신문사 자리라고 고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육신 묘소가 있는 곳[동작구 사육신역사공원]은 처형 장소인 광화문에서 직선거리로 7.7km 떨어져 있는 한강변 노량진 언덕입니다.
사육신묘역 내에 정조 6년에 세운 ‘신도비’에는 이곳 사육신묘역을 처음 조성한 이가 “매월당 김공 시습”이라고 명토박아 새겨두었다. 사진=필자 제공
처형당한 사육신의 죽음을 수습해준 인물은 김시습이라는 기록 밖에 없습니다.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은 자신의 저서 《미수기언》에서 김시습이 버려져서 아무도 수습할 엄두도 못내던 사육신의 주검들을 수습해 묻어주었다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허목은 《미수기언》에서 형장이 한강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형장이 한강변이었다면 김시습이 황망하게 형장에서 멀지 않은 노량진 언덕으로 주검들을 지어올려 묻어주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목의 이 대목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세조실록》에 처형지가 당시 “군기감 앞길[軍器監前路]”이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입니다.
처형지에서 가까운 주검을 묻을 수 있는 야산을 찾자면, 인왕산이나 북악산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시습은 그런 곳이 아니라 왜 7.7km나 떨어진 한강변 노량진까지 사육신의 주검들을 수습해 와야 했을까요? 사육신들은 세조에게 ‘역적’으로 처형 당했으므로, 조선의 수도 한양의 주요한 산줄기를 이루고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에는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은 사대문 밖으로 주검들을 엎고 나갔어야 했겠지요.
당시 김시습은 승려 신분이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시습은 출가 전에 부리던 머슴 한 명을 데리고, 야음을 틈타서 처형당한 뒤 버려져 있는 사육신의 주검들을 수습하기 위해 지게에 주검들을 지어 날랐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여섯 구의 주검들을 나르려면 적어도 처형 장소인 광화문에서 가매장한 한강변 노량진까지 세 번은 왕복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맨몸으로 걸어서 7.7km를 가더라도 성인걸음으로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김시습은 거열형 당한 처참하게 조각난 주검을 지고 캄캄한 밤중에 이 먼 길을 세 번이나 오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김시습은 부당하게 권력을 폭력으로 찬탈한 권력자에게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과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조선 땅의 선비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에서 제작한 드라마에서 재현한 거열형 장면. 사진=필자 제공
김시습은 이들의 이름을 밝히고 비석을 세워줄 수 없어서, 성씨지묘, 박씨지묘, 하씨지묘, 유씨지묘, 등과 같이 성만 밝혀서 당시 부인들을 매장한 것처럼 꾸며서, 나무 비석을 세워두었습니다.
이 덕분에 이곳이 사육신이 묻힌 곳으로 알려지게 되어, 숙종 7년(서기 1681년)에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고, 정조 6년(서기 1782년)에 신도비(神道碑, 무덤 남동쪽에 묘 주인공의 삶을 기록한 비문)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곳에 서울시와 동작구가 조성한 ‘사육신 역사공원’이 마련되어 있으며, ‘사육신 역사관’이라는 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주검들을 수습한 구체적인 과정과 심경이 궁금해서 이곳을 두 번이나 찾았으나, 전시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육신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내용에는 당시 처형당하고 버려진 사육신의 주검들을 수습한 김시습이라는 인물의 외로운 고투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떠올랐습니다.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딸의 이름입니다.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내전에 휘말려 전사했는데, 당시 테베를 다스리던 섭정왕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그의 장례를 금지합니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혈육을 위해, 섭정왕의 명령보다 더 높은 도덕률을 따르겠다”라며, 전장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묻어주려다, 크레온에게 처형 당합니다. 이 줄거리를 바탕으로 연극 드라마로 창작한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인 비극 《안티고네》입니다.
영국의 19세기 화가 프레데릭 레이튼이 그린 안티고네.Antigoneleigh. 사진=필자 제공
안티고네가 실제 권력자의 명령 대신, 방치되어 있는 혈육의 주검을 방치할 수 없다는 도덕률을 따라 실정법에 맞설 용기를 낸 행위였다면, 김시습은 사육신들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지만 부당하게 권력을 찬탈한 권력자에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주검을 수습함으로써 정당성이 없는 권력에 맞서는 선비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후 조선 역사에서 사림(士林)의 선비 정신의 표준을 세운 이정표가 됐다고 평가받습니다. 이런 위대한 실천이 행해진 곳에 김시습이 처음 방치되어 있는 사육신들의 주검들을 수습한 위대한 고투에 대해 단 한 글자도 단 한 건도 전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사육신역사관’을 세우고 전시를 기획한 이들이, 이곳 유적지를 찾는 후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줘야겠다는 고민을 거의 해보지 않았다는 비판을 자초할 수밖에 없는 사태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사육신역사공원의 책임자, 학예사들은 사육신역사공원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의 비문이라도, 원문을 전시하고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해서 전시해서 이곳을 찾는 후손들이 이곳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변천 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마땅할 것입니다. 정조 6년에 세운 신도비 비문에는, 이곳에 “매월당 김공 시습”이 사육신의 주검들을 수습해 묻어주었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오늘날 기획해서 꾸민 전시가 200년 전 정조 시대의 신도비 내용보다도 부실하다면, 어떤 존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