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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인사이트)R&D 대신 자사주매입 택하는 기업들…장기성장 어쩌나

행동주의투자자 압박 등에 자사주매입 급증…경제혁신·부의 재분배 기능 악화

2015-12-15 13:54

조회수 : 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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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피오리나가 지난 1999년 휴렛패커드(HP)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중 하나는 자사주매입이었다. 그는 2005년에 물러날 때까지 6년간 140억달러를 자사주매입에 투입했다. 당시 순익 120억달러보다 많은 돈이었다. 피오리나의 후임인 마크 허드는 5년간 430억달러를, 그 뒤를 이은 레오 아포테커는 11개월간 100억달러를 자사주매입에 쏟아 부었다. 12년간 순익보다 더 많은 돈을 자사주매입에 사용하면서 닷컴버블 이후 떨어진 주가는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하지만 핵심사업의 매출과 이익률은 계속 하락했고 변변한 히트상품 또한 내놓지 못했다. 결국 HP는 구조조정을 위해 올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분사를 단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8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HP의 사례는 한때 혁신기업이었던 곳이 자사주매입을 통한 주가상승에 취해 어떻게 망가졌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현재 HP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HP처럼 주가부양 등을 위해 대규모 자사주매입에 나서는 기업이 늘며 산업 전반의 장기성장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자료사진/로이터
 
8850억달러와 8470억달러. 지난해 2000여 곳의 미국 내 비금융기업이 자사주매입 및 배당금으로 사용한 금액과 이들 기업이 벌어들인 순이익이다. 톰슨로이터는 최근 이 같은 집계 결과를 공개하면서 "경기불황기를 벗어난 이후 처음으로 자사주매입과 배당 등 주주환원정책에 쓰인 돈이 순이익을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주주환원정책을 위해 쓰이는 돈은 급증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주주환원정책을 펼친 미국 내 1900개 회사를 분석한 결과 자사주매입과 배당금으로 사용한 돈은 전체 자본지출의 113%에 달했다. 이 비율은 1990년에는 38%, 2000년에는 60%에 불과했다. 10년마다 거의 두 배씩 늘고 있는 셈이다.
 
올해에도 자사주매입 열풍은 이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시장조사업체 브리니어소시에이츠를 인용해 올 1~9월 미국 기업들의 자사주매입이 5167억2000만달러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금융위기가 있었던 지난 2007년 이후 최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 상장사의 자사주매입 규모는 작년보다 두 배 가까이 늘며 10조원에 육박했다.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으로 자기주식을 사는 자사주매입은 단기 주가부양을 위한 가장 확실한 장치 중 하나다. 하지만 자사주매입이 늘수록 장기성장에 필요한 자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잠식하는 기업'이라는 기사를 통해 "자사주매입과 같은 금융조작이 기업의 혁신을 잠식하고 성장속도를 떨어뜨리며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행동주의투자자·임원 보너스 때문에…
 
최근 기업의 자사주매입이 급증하는 데에는 행동주의투자자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행동주의투자자들은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기업에 자사주매입이나 사업부 분사, 경영진 교체 등을 압박하는 이들로 올해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무디스는 올해 행동주의투자자들이 펼친 공세가 지난해 222건보다 많은 225~235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3월 50억달러 규모의 자사주매입 계획을 발표한 제너럴모터스(GM)이나 40억달러에 해당하는 자사주를 되사겠다고 밝힌 듀퐁 모두 행동주의투자자의 압박에 손을 든 케이스다.
 
자사주매입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퀄컴 등 IT 기업들이다. 특히 애플은 올해 302억2000만달러 들여 자사주를 매입했으며 MS는 142억달러, 퀄컴은 96억달러를 자사주매입에 사용했다. 대규모 자사주 매입은 주식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공급은 줄이는 역할을 하며 대체로 주가부양 효과를 낸다. 실제로 애플의 주가는 올해 8.1% 올랐고 MS의 주가는 16.7% 상승했다. 다만 자사주매입이 주가상승으로 항상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퀄컴의 주가는 33.2% 하락했다.
 
주당순이익(EPS)과 임원의 성과급을 연계한 시스템도 자사주매입을 이끌고 있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면 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은 줄어든다. 실적은 크게 개선되지 않더라도 주당순이익은 상승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포춘지는 이에 대해 "실적 부풀리기"라고 지적했다. 도이치뱅크는 올해 자사주매입으로 S&P500 기업의 주당순이익이 1.4%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며 이를 제외한 실제 주당순이익은 작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호워드 실버블래트 S&P500 선임 인덱스 애널리스트는 "최근 1년간 S&P500 기업의 20% 이상이 유통주식을 4% 넘게 줄였다"며 "12%는 이미 자사주를 너무 많이 매입해 실제 실적이 개선되지 않더라도 주당순익이 최소 4% 이상 오르는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IBM이다. IBM은 지난 10여년간 자사주매입에 1250억달러 이상을 쏟아 부었다. 그 영향으로 주당순이익은 2007년 이후 66%나 상승했다. 하지만 실제 순익인 15% 오르는 데 그쳤다. 결국 IBM은 실적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현재 임직원 수는 2012년보다도 5만5000명이나 적다. 하지만 2011년 IBM을 떠난 샘 팔미사노 전 CEO는 3년의 재임기간동안 주당순이익과 연동된 임금체계 덕에 8700만달러의 보너스를 챙길 수 있었다.
  
R&D 투자 감소…부의 재분배 기능 악화
 
주가를 높이는 자사주매입이 기업에 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장기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업들이 순이익보다 더 많은 금액을 자사주매입에 사용하면서 연구개발(R&D) 투자는 상대적으로 등한시됐다. 2005년 이후 주주환원정책에만 1570억달러를 사용한 IBM은 R&D 등에는 1110억달러만을 투자했다. 같은 기간 화이자는 1390억원을 주주들에게 뿌리면서 R&D에는 820달러만을 투자했고, 포스트잇도 480억달러를 주주환원정책에 사용하는 동안 R&D에는 160억달러만을 썼다.
 
로이터통신은 이 같은 경향이 장기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게리 피사노 하버드 경영대 교수는 "미국은 TV와 반도체, 태양광전지 등 모든 분야의 생산에서 뒤쳐지고 있다"며 "인도나 브라질은 기업의 현금을 가지고 다양한 성장활동을 만들어내겠지만 미국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방위산업 관련 기업들도 자사주매입에 나서면서 국가 안보까지 위협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R&D 투자 대신 기업들은 인수합병(M&A)에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신사업을 개척하고 있는 스타트업 인수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킨 중요한 발명품인 전구나 레이저, 컴퓨터, 항공·우주과학 등이 애플이나 IBM, HP 등대기업의 대규모 투자에서 탄생했음을 생각하면 새로운 혁신이 발생하기 힘들 것이라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자사주매입은 부의 재분배 기능도 악화시킨다. 주주환원정책 등의 영향으로 미 증시는 금융위기 이후 역대 최고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주가상승의 덕을 본 것은 주주와 기업 임원에 불과했다.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해 직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소수의 부유층에 집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경제 전문가를 인용해 "상위층으로 이익이 집중되면서 중간계층의 일자리는 사라졌다"며 "미국의 실질경제는 40년 전에 비해 두배나 성장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낀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서 자사주매입 제동 움직임
 
내년에도 자사주매입 열풍은 쉽게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기업의 현금보유고가 사상 최대수준을 기록하고 있어 자사주를 매입할 실탄은 충분하다. 또 미국이 금리를 올리더라도 여전히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회사채를 발행해 자사주를 매입하기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로버트 레이파르트 브리니어소시에이츠 애널리스트는 "만약 기업들이 계획대로 집행에 나선다면 향후 2년간 사상 최대 규모의 자사주매입이 이뤄질 전망이다"고 말했다.
 
자사주매입의 부작용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정치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6년 치러지는 미 대선의 민주당 경선 후보로 나선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기업의 투자관점을 단기 중심에서 장기 중심으로 돌리겠다는 것을 주요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단기투자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고 자사주매입과 임원보수 등에 대한 엄격한 정보공개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같은 움직임이 장기적 성장을 위한 요소에 투자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보수를 지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상원의원인 엘리자베스 워런과 태미 볼드윈은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자사주매입을 시장조사의 잠재적인 형태로 조사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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