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최병호

choibh@etomato.com

최병호 기자입니다.
(시론)박근혜 탄핵의 혼합정체론

2016-11-29 09:09

조회수 : 2,701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마비됐다. 최순실이 전횡을 휘두를 때는 그나마 국정운영이 작동했다는 게 서글플 정도다. 그러나 최순실 구속과 측근 3인방의 사임 이후 국정은 멈췄다. 국정 회복을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오늘이라도 국무위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찾아가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정 농단의 방관자가 된 자신들의 직무유기를 만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다. 대통령에 대한 항명 파동이 이 나라를 구할 길이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봉사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전체라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국민에 대한 마지막 봉사다.
 
그러나 그럴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당시 허정 전 외무부 장관이 했던 일을 지금 장관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게 또 하나의 불행이다. 박 대통령의 자진 사퇴나 국무위원들의 항명을 기대할 수 없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탄핵뿐이다. 지금 대통령 탄핵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새누리당조차 국정 농단의 실체가 이 정도로 진상스러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여당이 취할 태도는 탄핵 소추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길이다.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의 국정운영은 민주화 세력, 산업화 세력 그리고 대통령의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라고 할 수 있다. 혼합정체론을 처음 공화주의적 국정운영의 기본 틀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를 로마 공화정에 적용시켰던 폴리비우스, 피렌체 도시공화정에서 작동 원리로 제기했던 브루니, 그리고 견제와 균형을 적용한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 모두가 민주화 이후의 안정적인 국정운영 모델로 같은 이론을 제시했다. 소수인 귀족, 다수인 평민, 그리고 1인 지배인 국왕이나 대통령이 모두 국정에 참여할 때, 그 사회의 정치안정은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1494년 피렌체 도시 공화정에서나 17~18세기 대서양 양안의 자유주의자, 휘그(Whig)들이 경이롭게 바라보고 본받으려고 했던 천년공화국 베네치아 국정 운영도 혼합정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베네치아 도시국가의 대표적 공화주의 이론가였던 가스파로 콘타리니(Gasparo Contarini)는 이 도시 공화정에서 "다수는 다수의 횡포로 흐르지 않고, 소수는 소수대로 가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며, 국가원수도 그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군주제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국정 운영에서 다수인 민주화 세력과 소수지만 대기업과 보수언론 등 자본을 장악한 산업화 세력이 정치적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10년씩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를 놓고 정치적 사투를 벌여왔다.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은 10년을 번갈아가며 집권하면서 5년 단임제 정부를 한 쪽에 의한 다른 쪽의 배제로, 반쪽짜리 국정 운영을 반복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의 높은 지지율, 정권 중반 '반환점 증후군'에 따른 지지율 하락 그리고 정권 말기에 10~20%의 지지율로 청와대가 고립된 섬으로 변하며 임기를 마감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정권 막바지의 지지율 하락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부패 스캔들로 침몰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은 혼합정체의 가장 핵심적 축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썩은 사과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국민적 신뢰는 무너지고 지지율 5%도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광화문 등 전국의 시민대집회에서 190만명의 국민이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제도 정치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수단은 탄핵밖에 없다.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듣는 검찰조차 현직 대통령을 각종 부패 스캔들의 공범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엉뚱하게도 '제3지대론'을 통한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등장했다. 친박과 친문 세력을 기득권 집단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여야 세력이 제3지대에 집결, 새로운 권력을 만들 수 있다는 인위적 개편 논의이다. 본말이 전도됐다. 대규모 시민대집회와 국회의 이중권력이 형성된 공화주의적 계기에서 정치적 균열구조를 인위적으로 개편하는 정치적 기획은 역사에서 성공한 전례가 없다. 지금 탄핵정국의 본질은 산업화 세력 내부에 곪은 박근혜라는 썩은 사과를 스스로 도려내는 자기 혁신이다. 때문에 탄핵은 민주화 세력보다 산업화 세력이 먼저 제기해 생존을 위한 변화의 몸부림으로 전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대집회의 공화적 열기는 산업화 세력 전체를 다음 선거에서 불태워 버릴 것이다.

산업화 세력의 곪은 상처를 민주화 세력과 함께 탄핵을 통해 도려낸 뒤 새로운 대통령을 조기에 선출하는 게 지금 시민대집회가 요구하는 정치과정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지금 사태의 한 원인인 여당이 자신들은 박근혜 게이트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야당 일부와 정치연합을 통해 제3지대를 만들어 정권 창출을 노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기 모순적이다. 정치세력들은 이해득실이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위해 이번 탄핵정국에서는 사심없이 일 자체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조국(Patria)에 대한 애국주의가 선행된 다음에야 정파들의 이해득실도 존재할 수 있다.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 최병호

최병호 기자입니다.

  • 뉴스카페
  • email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