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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여론조사 만능주의에서 탈출하라

2017-01-16 18:15

조회수 : 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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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에 도취(L'ivresse des sondages)’.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랭 가리구(Alain Garrigou)가 여론조사에 열광하는 현대사회를 조롱하며 한 말이다. 가리구는 그의 저서 <여론조사에 도취> 서문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식으로 아이디어를 모아 새로운 사전을 편찬한다면 여론조사는 ‘어김없이 틀리는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보다 40년 앞서 프랑스 정치사회학자 마들렌느 그라위쯔(Madeleine Grawitz)와 피에르 브르디외(Pierre Bourdieu)는 “어떻게 여론조사 결과를 ‘여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며 여론조사의 사회적 수용을 용인하는 그룹을 맹비난했다.
 
학자들의 이러한 논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론조사는 버젓이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처음으로 등장한 여론조사는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후보의 승리를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성공의 신화를 기록하고 세계 곳곳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1948년 미국 대선에서의 결과는 달랐다. 갤럽을 비롯한 굴지의 여론조사 기관들은 공화당 후보 토마스 듀이의 승리를 예고했으며 유력 일간지였던 시카고 트리뷴은 이에 가세해 “듀이, 트루먼을 물리치다”라는 1면 톱기사를 냈다.
 
그런데 정작 투표함을 열자 승리자는 해리 트루먼으로 바뀌며 언론과 여론조사업계 관계자들을 당황시켰다. 선거 다음 날 뉴욕타임스는 저울의 한쪽 면에 ‘정치전문가, 여론조사전문가, 신문, 라디오’와 함께 있는 듀이를, 다른 한쪽 면에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콧수염을 기른 ‘보통 사람(John Q public)’에게 기대고 있는 트루먼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 이 만화에서 저울은 민주당의 트루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선거가 전문가들에 대한 국민의 설전이었음을 여지없이 희화화한 풍자였다.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처럼 모욕을 당했지만 별다른 반성 없이 선거 때마다 수요를 늘려갔다. 근래에 들어서도 ‘여론조사 홍수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론조사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사상 유례없는 수난기를 맞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대통령 선거, 프랑스의 우파 오픈프라이머리, 한국의 4·13 총선까지 굵직한 주요 선거에서 모조리 빗나가고 있다. 급기야 프랑스 언론 르 파리지앵/오주르디(Le Parisien-Aujourd'hui en France)는 “오는 대선 기간 동안 여론조사를 의뢰하지 않겠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 신문은 “최근의 여론조사들은 사회를 이해하거나 최종결과를 예측하는데 무능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어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이 애를 먹고 있다”며 이같이 발표했다. 이는 여론조사의 방법을 문제 삼거나 비난하고자 할 목적이 아니며, 단지 여론조사가 일순간의 여론을 포착한 일종의 ‘스냅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도로 쓰이고 있어 이에 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후보자들의 순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소형 말들의 경주’에 주목하는 보도를 특히 피하고 싶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오는 대선에서 우리는 현장 르포기사를 제1순위로 삼기로 했다. 각각의 후보들이 가지고 있는 큰 주제들로 지면을 할애하고,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사안들을 독자들이 보다 잘 헤아릴 수 있게 판독·분석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함으로써 현장의 저널리즘에 보다 집중할 것이다”. 이 신문의 편집국장 스테판 알부이(Stéphane Albouy)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르 파리지앵/오주르디는 이번 대선 기간 동안 스스로 주문한 여론조사를 1면에 장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다만 여론조사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 다른 언론이 여론조사를 실시해 연구한 것을 인용할 방침이다.
 
선거에 직면해 저널리즘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여론조사와 거리를 두는 르 파리지앵/오주르디의 결단을 보면서 한국 언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대선정국에 돌입한 한국의 언론들은 주요 주자들의 지지율을 측정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낸다. 또한 후보들의 등수를 매겨 나열하는 경마식 보도만을 일삼는다. 르포나 현장취재, 국민에게 영향을 주는 이슈들을 부각시켜 퀄리티 있는 선거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각 정당은 어떠한가. 여론조사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이 마당에도 여론조사 결과를 버젓이 선거 때마다 공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불신의 도구를 선거의 결정적 도구로 계속 삼는다면 한국 언론도 대선 다음 날 ‘트루먼의 카툰’으로 풍자될 것이 뻔하다. 이 같은 비극적인 장면을 마주하기 싫다면, 우리 언론과 정치권은 여론조사 만능주의에서 하루빨리 탈출해야 한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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