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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곤

(시론)이상(李箱),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2017-01-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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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뛰어난 공학도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 공대의 전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잡지 <조선의 건축> 표지 공모에서 1등과 3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독(多讀)의 인문학도였다. 1936년 나이 스물일곱에 일본으로 건너가며 “조선에서는 더 읽을 책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듬해 2월 그는 도쿄에서 ‘불량선인’으로 체포된다. 폐병이 악화하면서 풀려났지만, 결국 그해 4월 눈을 감는다. 본명 김해경. 이상(李箱) 시인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있다. 이름은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그는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물리학도였다. 특출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대학원 졸업 후 수년 동안 한 편의 논문도 쓰지 못했다. 답답했던 학과장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원래 너의 친구를 강사로 초빙하려고 했는데, 형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채용한 것이니 분발하라.” 치욕스러운 꾸지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추운 겨울밤에도 아이가 울면 업고 집 밖으로 나갔다. 연구에 몰두하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독려와 내조 덕분이었을까? 결국, 그는 1934년 ‘중간자’ 이론을 통해 원자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규명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때의 일이다. 
 
무엇보다 이상은 천재 시인이었다. 수학, 물리학, 기하학 등 공학과 자연과학의 세계를 건축뿐 아니라 시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오감도(烏瞰圖)’에 이어 “사람은 광선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하고 때때로 과거를 미래에 있어서 도태하라”로 끝나는 ‘선(線)에 관한 각서’에서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를 찾기도 한다.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는 공간과 기하학에 관한 그의 지적 감수성이 발견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융합형 인간이자 모던보이였던 청년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운명을 넘지 못한다. 그가 눈 감은 4월, 도쿄의 거리에는 벚꽃이 눈처럼 휘날렸으리라.     
 
이상은 28세의 나이에 낯선 이국땅에서 꽃다운 생을 마감했지만, 유카와 히데키는 그 나이에 화려한 꽃을 피운다. 그는 유학을 가지 않은 국내파였다. 하지만 중학교 4학년 때 당시 일본을 찾은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마치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듯” 들었다. 독일의 하이젠베르크와 영국의 디랙, 덴마크의 보어 등 당시 물리학의 변혁을 주도하던 젊은 과학자들(이들은 모두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을 일본에서 직접 접하며 자극을 받았다. 중간자 발표 이후 물리학계의 스타가 된 유카와 히데키는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소, 컬럼비아대학 등의 초청으로 미국에 체류한다. 그리고 1949년 그곳에서 노벨 물리학상 선정 소식을 듣는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와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두 청년의 삶은 식민지 조선과 침략국 일본의 운명만큼이나 엇갈린다. 과학저술가 정인경 박사는 <뉴턴의 무정한 세계>에서 이 두 청년의 삶을 이렇게 비교한다. “한국문학계를 빛낸 천재 시인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상보다 3년 일찍 태어난 유카와는 28세의 나이에 중간자를 발표하고 세계무대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상은 28세가 되던 1937년에 도쿄에서 ‘불량한 조선인’으로 체포된 뒤 폐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한 명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건축학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횡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식민지 본국 일본에서 태어나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엇갈린 운명이 어디 이들뿐이랴.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소녀는 위안부가 되었다. 상당수는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살아남은 소녀는 고통과 치욕 속에 살아야 했다.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아사코가 화병에 담을 스위트피를 꺾고 있을 때, 남자(피천득)에게 자신의 하얀 운동화를 자랑할 때, 조선의 소녀들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능욕당하고 병들고 죽었다. 위안부와 이상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날개를 채 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꺾이고 추락했다.  
 
시간은 흘렀지만, 역사는 멈춰있다. 10억 엔을 줬으니 약속 지키라고 으름장 놓는 일본보다 “부산 소녀상 설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언행은 자제하자”고 말하는 우리 정부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 우리 땅에서의 추모와 기억의 방법조차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주권국가가 아니다. 우리 땅에서 상징물조차 마음대로 설치할 수 없는 어떤 밀약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효다. 10억 엔을 되돌려주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목 놓아 노래했던 천재는 날개가 돋기는커녕 여전히 박제가 되어 있다. 이제 그를 마음껏 날게 하자. 그럴 때도 됐다.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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