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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4회)탑골공원 변천사

“집 없는 자들의 집 / 일터 없는 자들의 일터였다”

2017-02-20 06:00

조회수 : 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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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여학생에게 종묘를 안내했을 때 종묘공원에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놀라워했던 적이 있다. 노인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 왔으니 아마 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때 거기에서 바둑을 두거나 담소 내지 논쟁을 하거나 낮술을 즐기던 이들의 모습은 2007~2016년 봄 재정비사업을 끝내고 새로 선보인 종묘광장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장의 새 매점이나 종묘 앞길에서 혹은 지하철역에서 서성이는 노인들을 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탑골(파고다)공원에서 종묘광장으로 내몰렸던 이들일 것이다.
 
탑골공원과 종묘광장
탑골공원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서려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3호) 같은 문화재가 있고, 1919년 3월 1일 4~5천명의 학생들이 12시를 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해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이기도 한 사적지가 노인들의 사교공간ㆍ오락공간으로 활용되자, 1998년 문화재 보존을 위한 공원의 성역화 정책이 실시된다. 음식물 반입과 흡연이 금지되어 공원 내 무료배식은 공원 밖 건물을 임대해(원각사 무료급식소) 이뤄지게 되었고, 사대문 중 후문과 동문이 폐쇄되어 정문과 서문만 개방되었다. 노인들은 여전히 삼삼오오 모여 시국과 정치를 논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후 많은 이들이 종묘로 옮겨가게 되었다.
 
급속히 고령화되는 사회 속에서 노년층에 대한 복지정책의 취약점(전달 체계의 불합리성), 노인을 위한 기반시설과 프로그램의 부족에 덧붙여 2000년대 들어서부터는 남성노인의 외로움과 여성노인의 빈곤이 만나 이뤄지는 성매매의 상징어가 된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할머니)’의 출현과 같은 새로운 사회문제까지 등장했다. 2010년대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조선족 여성들이 이 박카스 아줌마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하는 새로운 현상도 대두되었다. 한편, 음주가무와 도박ㆍ성매매가 이루어지던 종묘광장 역시 2007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국악정이 철거되고 이동식 노래방 기기가 사라졌으며, 윷놀이 도박이나 성매매 단속이 강화되고 무료급식소도 인근 복지센터들로 분산ㆍ이전되었다. 탑골공원이 그랬듯이, 이제 종묘광장을 찾는 노인들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종묘 부근의 지하철역과 뒷골목에서 행해지는 음성적인 노년의 성매매는 아직 남아 있다. 이는 실로, 복합적인 사회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풀기 어려운 사안이다.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오후, 광화문 촛불집회에 가기 전에 들른 탑골공원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관람객들 사이로 탑골공원의 ‘전통’과 같았던 어르신들도 몇몇 보였다. 한편에서는 개신교 전도를 하러 온 이들과 종교토론을 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토론을 하는지 ‘등소평’, ‘박근혜’ 같은 이름들이 들린다. 반면 종묘광장에는 더욱 적은 수의 노인들이 간혹 보였는데, 종묘에서 근무하는 분의 말에 의하면, 토요일이라 다들 집회에 갔을 것이라고 한다. 주로 대통령탄핵반대집회―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나오는―쪽이냐고 물으니, 미소만 짓다가 “그리로 갈수도, 다른 쪽으로 갈수도 있겠지요”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실로 우문현답이다.
 
원각사 시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알려진 파고다공원은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은 있으나 1890년대에, 당시 총세무사이던 영국인 브라운(J. Mc. Brown)이 고종에게 건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탑이 있어 처음에는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탑골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곳의 원류는 조선시대의 원각사(圓覺寺)이고 그보다 더 앞선 기원은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이다. 즉, 흥복사 터에 세조가 중건한 절이 원각사이다. <만인보>가 묘사하는 원각사의 “4월 초파일 밤 / 사대문 안팎 통금 없이 눈부”신 밤은 각양각색의 등으로 넘쳐난다. “수박등 / 일월등 / 거북등 / 오리등 배등 연화등 학등 / 잉어등 항아리등 누각등 마늘등 / 댕댕 종등 / 물렀거라 가마등 / 짤랑짤랑 방울등 / 용등 / 훨훨 부채등 / 태평성대 태평등 / 남산등 / 알등“(‘원각사 행자’, 10권). 고은 시인이 부여한 흥겨운 운율에 실려 형형색색의 등이 넘실대는 듯하다.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는 1471년(성종 2)에 세운 대원각사비에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불심이 깊었던 세조가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고,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3층의 기단과 10층의 탑신)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했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 가라사대
서방의 큰 성인은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았다라고
석가세존을 찬하였다
이래야 한다
이래야 한다
이 산이
다른 산을 난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 일찍이 세조는
석씨의 도는 공씨의 도보다 나을 뿐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이다
라고 술회하며
유자의 배척을
외우 벗어났다
 
세조는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어
금강경을 손수 사경(寫經)하였고
능엄경 법화경을 간행하였고
 
당대의 명승
혜각존자 신미
선종판사 수미
영산회상곡 한글로 지어
한글을 정착시켰다
 
원각사 10층탑 세워
원각사를 왕실 원찰로 삼았다
청기와 8만장
구리 5만근짜리 범종 매달고
승려 2만 모여
원각사 준공 법회를 베풀었다
왕과
백부 효령화상이 함께였다 노산군 명복 빌지 못했다
 
< … >
 
보름달 뜨면 미복 차림 원각사에 납시었다 가슴 한쪽 없는 듯
(‘원각사’, 25권)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경전을 간행하고 절들을 세워 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나, 자신이 죽인 조카 노산군(단종)의 명복을 빌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다 죽은 세조의 심정이 마지막 구절―“가슴 한쪽 없는 듯” 허(虛)하고 “미복 차림”으로 원각사에 행차한―에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원각사는 연산군 시절에 수난을 겪게 된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여기로 옮겨와 원각사를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방으로 만들어버리고 승려들을 내쫓은 것이다.
 
연산군은 불법을 불법승을
몹시도
몹시도 미워하여 마지않았다
 
어쩌다 거둥길에
성안의 절간 보면
크게 화를 내니
 
그동안 근근이 맥을 잇던
선종 본산 흥천사
교종 본산 흥덕사
둘 다
궐 밖에 납시는 흥청망청 잔칫집이 되었다
밤마다
횃불 달고
외줄놀이 화살놀이
처녀들 알몸놀이 질탕하였다
 
그것으로 모자라
하나 남은 원각사도 기방(妓房)으로 만들었으니
궐 안 채홍사
궐 밖 채홍사
제철 만나 납시었으니
여염집 마님도
어느날 밤 기녀로 와야 하고
궐 안 궁인도
어느날 밤 기녀로 나와야 하니
 
조선의 정절 수절 온데간데없더라
 
< … >
(‘원각사 기방’, 25권)
 
파고다공원, 탑골공원의 시대
시대에 따라, 또 권력의 판도에 따라, 하나의 공간이 겪어온 영욕은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세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누린 원각사의 영화는 연산군 때 기방으로서의 치욕을 겪더니―연산군이 기생과 악수(樂手)를 두어 자신의 향락을 위한 관청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문제이지, 사실 장악원을 옮긴 것 자체는 물론 치욕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원만큼 예술이 중요하므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또다시 연회공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1910년 한일병탄늑약 이후에는 이곳에 요정이 들어서 통감부 관료들과 일본인들이 즐기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은 파고다공원을 3ㆍ1운동의 점화지로 만들었고, 비록 그로 인해 공원이 폐쇄되기도 했으나 조선민중들의 상징적인 저항공간으로 남았다.
 
역사의 한 공간으로 남은 탑골공원처럼, 1980년의 서울역과 금남로, 80년대의 연합시위가 종종 열리던 명동성당이나 연세대, 1987년 백만 인파가 운집했던 시청 앞 광장과 2008년 같은 곳에서 이루어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관련 촛불집회, 그리고 2016년 말에서 2017년의 촛불로 이어진―실로 기네스북에 오를 놀라운 지구력의―영롱하고 순정(純正)한 그리고 평화로운 시민혁명의 장소인 광화문도 그 탑골공원의 운명처럼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채울 것이다. 그 탑골공원, 그 파고다공원의 씁쓸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다음 모습들은 해방과 전쟁, 산업화시대를 거치고 살아남았으나 배려 받을 수 없었던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의 여정이 다다랐던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에서 늘 멀었고 물질적 풍요로부터도 멀었던 평범한 아버지들이다. 그리고 때로는 정신의 상처로 인해 마음이 늙어버린 청년도 그 옆에 있다.
 
원각사탑이 서 있다 때때로 얼음조각 같다
제2차 환도 이후
파고다공원은
얼음조각 언저리가 떠들썩했다
집 없는 자들의 집
일터 없는 자들의 일터였다
 
아침 열시부터
탑 둘레에 하나둘 왔다
저녁 다섯시 지나
하나둘 갔다
 
여기저기
백명쯤
또는 스무명쯤 모인 데서
헌 부채 꼬나쥐고
열변을 토해내는 자 있다
 
단군도 나오고
임경업도 나온다
김종서와
칠삭둥이 한명회도 나온다
 
후줄근하다
눈빛 탁하다 주름살 개펄이다
 
가로되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우리나라는 동양 제일의 나라가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3백국의 조공을 받는다
 
날마다 빠지지 않는
김동복 씨
두어 시간 열변 뒤
누가 국수 한그릇 사주면
후루룩
국수물 비우고 나서
가로되
 
앞으로 대한민국이
세계의 대통령연합회
회장국이 될 것이여
두고 봐요
두고 봐요
아 국수 맛없다
 
맛있다는 말을
맛없다고 잘못 말했다
 
< … >
(‘파고다공원’, 17권)
 
늙은이 북적대는 곳 / 덕지덕지 저승꽃 핀 / 늙은이끼리 / 멱살잡이 싸움질도 하는 곳 /
탑골공원에 / 그가 있다 // 청진동 이면도로 / 만수다방 / 늙은이 북적대는 곳 / 거기에 /
그가 있다 // 손등마다 심줄 꿈틀꿈틀 / 호두알 굴리는 곳 / 천하대사를 놓고 / 이렇다 /
이렇다 떠들다가 / 차 나르는 아가씨 엉덩이도 만지는 곳 / 거기에 / 그가 있다 // 나이 서른의 젊은이인데 /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물으면 / 여기만이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하고 / 몇 살이냐고 묻노라면 / 65세라고 말한다 // 듣자하니 나이 속이다가 군대에 끌려갔다는 것 /
내무반 상사한테 / 기합 받고 정신이 다쳐 / 의병제대했다는 것 / 그래서 마음속으로 실성실성 늙었다는 것 // < … > (탑골공원 그 사람’, 11권)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탑골공원에서 한 시민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 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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